숫자로 풀어보는 ‘기업가의 신조’의 의미
시대가 마치 공짜를 당연하게 여기도록 부추기는 것 같아서 공짜 없이도 사람의 삶이 얼마나 멋질 수 있는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글 ‘기업가의 신조(The Entrepreneur’s Credo)’ 의 의미를 숫자를 통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 ‘기업가의 신조’는 1776년 토머스 페인(Thomas Paine)에 의하여 작성되고* 1986년에 ‘미국 기업가 협회’에서 채택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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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의 신조
The Entrepreneur’s Credo
나는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나의 능력에 따라 비범한 사람이 되는 것은 나의 권리이다. 나는 안정보다 기회를 추구한다. 나는 국가의 보살핌에 의지하는 미천하고 어리석은, 보호받기만 하는 시민으로 머물기를 원치 않는다.
I do not choose to be a common man. It is my right to be uncommon... If I can. I seek opportunity... not security. I do not wish to be a kept citizen, humble and dulled by having the State look after me.
나는 계산된 위험을 단행할 것이고, 꿈꾸는 것을 실천하고 건설하며 또한 실패하고 성공하기를 원한다. 나는 성취의 자극을 복지의 안락함과 바꾸기를 거부한다. 나는 보장된 삶보다 인생이 주는 도전을 선택한다. 나는 유토피아의 생기 없는 고요함이 아니라 성취의 전율을 원한다.
I want to take the calculated risk; to dream and to build, to fail and to succeed. I refuse to barter incentive for a dole; I prefer the challenges of life to the guaranteed existence; The thrill of fulfillment to the stale calm of Utopia.
나는 나의 자유를 자선의 안락함과 거래하기를 거부하며 나의 존엄을 구호품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위협에도 굽히지 않을 것이다.
I will not trade freedom for beneficence nor my dignity for a handout. I will never cower before any master nor bend to any threat.
자랑스럽고 두려움 없이 꿋꿋하게 몸을 세우고 서는 것,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 내가 창조한 결과를 만끽하는 것, 그리고 당당히 세계를 마주보며 이것이 신의 도움으로 내가 일궈낸 것이라고 말하는 것, 이것이 바로 나의 유산이며, 이 모든 것이 바로 기업가가 된다는 의미이다.
It is my heritage to stand erect, proud and unafraid; To think and act for myself, to enjoy the benefit of my creations and to face the world boldly and say: This, with my god's help, I have done. All this is what it means to be an entrepreneu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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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기업가의 신조’가 실려 있다.
‘기업가의 신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번역 텍스트가 있지만, 번역마다 다소 차이가 있어서 위의 것은 필자가 다시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원래 시의 형식으로 써져 있다.
‘기업가의 신조’를 읽고 있으면 거친 파도를 헤치고 신대륙으로 넘어온, 자유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패기에 찬 결기가 느껴진다. 국가에서 제공하는 몇 푼 되지도 않을 공짜 복지를 단호히 거부하고 자신의 노력으로 기업가가 되어 땀으로 자신의 탑을 쌓는 멋진 삶을 살아보겠다는 것이다. 그 생각의 당돌함과 자유로움에 전율이 느껴진다.
공짜 복지를 거부하는 패기와 자신감으로 가득 찬 ‘기업가의 신조’는 17세기 초반부터 시작된 유럽의 자유에 대한 담론에 그 지적 기초를 두고 있다. ‘기업가의 신조’는 위대한 자연법사상의 계보 위에 서 있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논할 수 있어야 ‘기업가의 신조’ 같은 것이 나올 수 있다. 우리나라는 왜 이런 것이 없고, 오히려 반기업 정서만 횡행할까?
토머스 페인이 이 시를 쓴 것은 1776년 1월이다. 1776년은 조선시대 영조가 죽고 정조가 즉위한 해이다. 조선시대의 사람들도 수많은 시를 썼지만 그들은 이렇게 패기 넘치고 멋들어진 시를 쓰면서 사회를 변화시키지 못했다.
늑대와 함께 자란 늑대소년이 문명인과 같은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소수의 천재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생각이란 환경의 지배를 받게 된다.
조선은 15세기 후반부터 17세기 말까지는 인구의 40%가 노비인 나라였다. 노비는 대략 말 한 필 정도의 가치를 갖는 양반들의 재산으로 인식되는 시대였기에 ‘개인’의 가치나 자유에 대한 담론을 꿈에라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몽테스키외(Montesquieu)는 1748년에 펴낸 「법의 정신」(De l’esprit des Iois)에서, 중국의 법적 상황을 검토한 뒤 “아시아에서는 노예제의 정신이 지배하고 결코 소멸하는 때가 없었다. 그리고 이 지방의 모든 역사에 있어서 자유로운 정신을 보여줄 단 하나의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라고 쓰고 있다.(몽테스키외 저, 신상초 역, 법의 정신, 을유문화사, 1990, 257면.)
조선에서는 고려 후기에 중국에서 들어온 대륙의 노예제의 정신에 가득 찬 유교(儒敎)가 패기 넘치고 자유로운 기업가적 담론을 불가능하게 만든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 제20편 제2장 ‘상업의 정신에 관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거래는 한편으로는 강탈에 반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 이익을 항상 엄격하게 따지지 않고 남의 이익을 위하여 자기의 것을 무시할 수 있게 하는 저 도덕에 반대하는, 일정한 엄격한 정의의 감정을 사람들 간에 형성한다.” (위의 책, 296면)***
보통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거래가 정의를 만들어 낸다.”는 몽테스키외의 역설이다. 필자는 아직 국내에서 이 몽테스키외의 역설에 주목한 연구나 언변을 보지 못했다. 대한민국은 지금 반기업 정서 대신에 상업의 정신과 그것을 생산해 내는 자유정신이 필요하다.
패기와 자유정신에 터 잡은 기업가의 신조로 무장을 하고 나라 밖 넓은 세계로 나아가는 청년들이 많아야 한다. 무상 복지에 길게 줄을 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생각의 사슬을 끊어야 한다, 이것이 이 시대에 ‘기업가의 신조’가 우리에게 전하는 의미이다.
[주석]
*토머스 페인은 18세기 미국의 작가이자 국제적 혁명이론가로 미국 독립 전쟁과 프랑스 혁명 때 활약하였다. 1776년 1월에 출간된 「상식론」(Common Sense)을 저술하여 미국 독립의 지적 기초를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였다.
**유교가 왜 노예제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는지에 대해서는 김경일 교수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 바다출판사, 2000, 116~131면에 있는 두 편의 글 “우리는 영원한 중국의 속국인가”와 “주자학, 그 위대한 사기극”을 참고하기 바란다.
***원 번역 텍스트를 필자가 이해한 내용으로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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