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한 해 생산되는 라면은 약 35억개다. 이를 5000만 인구로 나누면 국민 1인당 한 해 64개의 라면을 먹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50년 전에 처음 나온 라면은 불과 10원에 판매됐다. 현재 시판 중인 라면의 가격은 평균 800원. 50년 사이에 80배 이상 몸값이 폭등한 셈이다.
라면의 원조 삼양라면
한국 최초의 라면은 1963년 9월15일 전중윤(사진. 95) 삼양식품 창업주가 개발했다.
전중윤 창업주는 우연히 남대문시장을 지나가 다 사람들이 한 그릇에 5원 하는 「꿀꿀이죽(남이 먹고 남은 것을 모아서 드럼 통에 넣고 다시 끓인 음식)」을 사먹기 위해 줄을 길게 선 것을 보고 국내 식량 자급문제 해결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때 전 회장은 과거 일본을 방문했을 때 라면을 시식했던 기억을 떠올렸고 이것이야말로 식량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라면은 일본에서도 막 출시된 신제품으로 제조 방식은 극비였다.
전 명예회장은 수소문 끝에 라면 생산 기술을 이전받을 기업으로 일본의 묘조(明星)식품을 꼽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달러가 귀했던 시기였지만 그는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찾아가 한국은행을 통해 미화 5만달러를 불하받은 상황이었다. 라면 생산설비 구매를 위한 종잣돈이었다.
전 명예회장은 묘조식품 오쿠이 사장을 큰 인물이라고 부를 만큼 고마움을 갖고 있다. 오쿠이 사장이 라면 제조기술 전수는 물론 삼양식품이 정상궤도에 오를 때까지 지원을 아까지 않아서다. 최남석 삼양식품 홍보실장은 『전 명예회장은 오쿠이 사장이 작고한 이후에도 그의 자녀들을 국내에 초청해 극진한 대접을 했다』고 전했다.
천상 「양반」인 전 명예회장은 끈질기게 라면에 매달렸다. 묘조식품 공장으로 25일간 출근해 공정을 익혔다. 그러나 전 명예회장에 호의적인 묘조식품도 가장 중요한 배합률에 대해선 가르쳐 주지 않았다. 다행히 그가 한국행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 배합비율이 담긴 봉투를 받게 된다. 삼양식품 관계자는 『당시 일본에서도 라면 제조기술은 신기술로 중요하게 여겨서 미리 알려줄 경우 비밀이 유출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말했다. 전 명예회장의 든든한 후원자인 셈이었던 묘조식품은 훗날 삼양식품에서 만든 라면을 수입, 일본라면업계에 큰 파장을 몰고 오기도 했다.
1963년 출시된 최초의 삼양라면
『라면은 무슨 옷의 옷감인가요?』
라면이 처음 접한 국민들은 옷감, 실 플라스틱으로 오해한 경우가 많았다. 이에 삼양식품 전직원과 가족들은 가두판매에 들어갔다. 극장ㆍ공원 등에서 1년 이상 무료시식을 진행했다. 효과가 나타났다. 행사 당시 「라면을 끓일 때 나는 향」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몰려들었다. 삼양라면의 출시가격은 개당 10원. 어려운 식량사정과 고가의 곡물가를 고려해 가난한 서민도 손쉽게 사서 먹을 수 있도록 값을 정한 것이다. 삼양라면은 초기 3년간 고난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시설 투자와 원료비ㆍ관리비 등을 감안하면 소비가격 10원은 원가에도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다.
개당 10원으로 출발한 삼양라면의 소비가격은 삼양제품의 보급·확대가 이루어지기까지 6~7년 동안 지속됐다. 그동안 밀가루값의 인상과 튀김용 기름(우지ㆍ돈지)의 도입가 인상이 원가부담을 가중시켰지만 삼양식품은 추가부담을 최대한 사내에서 흡수함으로써 가격인상을 자제했다.
그 결과, 우리 입맛에 맞춘 국물과 면발이 밥과 국에 친숙한 소비자의 입맛을 끌어당기기 시작했고, 때마침 1965년 정부에서 실시한 식량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혼분식 장려 정책이 나오면서 삼양라면은 날개 돋힌 듯 팔려나갔다. 저조했던 매출은 1966년 11월 240만 봉지, 1969년엔 월 1,500봉지로 급격히 늘어나 초창기 대비 300배 이상 성장했다.
[1970년대 공장 근로자들이 라면을 먹고 있다]
1980년대는 한국 라면의 전성시대였다. 삼양식품 외에 롯데공업(현 농심), 럭키(현 LG), 빙그레, 오뚜기, 야쿠르트 등 다양한 기업이 라면 제조에 뛰어들었다. 「사발면」 「너구리」 「안성탕면」 「짜파게티」 「팔도비빔면」 「신라면」 등 우리에게 익숙한 라면들이 모두 80년대 출시됐다.
「우지 파동」 무죄판결 받았으나 사세는 기울어진 뒤
승승가도를 달리던 「라면」에도 위기는 찾아왔다. 1989년 삼양식품이 공업용 소기름을 라면 제조에 사용했다는 '우지 파동'이 일어난 것. 이 파동은 8년 뒤 법정에서 무죄 판정을 받았지만 이미 삼양식품의 사세는 기울어진 뒤였다.
그러나 라면은 국민 식품으로 자리잡았다. 특히 1990년대 후반, 라면은 하나의 「요리」로 자리 잡게 됐다. 면은 기존의 국수를 기름에 튀겨 건조하는 방식에서 생면을 가공해 포장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생생우동」이나 「수타면」이 이때 출시됐다. 라면의 해외 수출도 이 즈음부터다.
2011년에는 「꼬꼬면」 「나가사키 짬뽕」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붉은색 국물 일색이던 라면 판도를 하얀 국물로 바꾸기도 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하얀국물 라면이 바로 50년 전 싱겁다는 이유로 국민들에게 외면 받았던 한국 최초의 라면과 비슷하다는 점이다.
닭 그림이 그려진 10원짜리 노란색 라면은 반세기 뒤 연간 2조원 규모의 거대한 시장을 만들었다. 지난 50년 동안 쌀과 함께 우리나라 사람들의 밥상을 지켜온 라면은 이제 한국인에겐 떼려야 뗄 수 없는 친근한 식품이 됐다.
전중윤 명예회장은 아들인 전인장 회장에게 경영을 맡긴 뒤 회사에 나오지 않고 자택에 머물고 있지만 집무실 4개 벽면 중 3개 면을 책으로 가득 채울 정도로 「독서광」인 그는 집에서도 책을 읽으면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1972년 자신이 직접 일군 강원 대관령삼양목장을 틈틈이 찾아 맑은 공기를 쐬는 것이 전 명예회장의 또 다른 즐거움이라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전인장 회장은 20년 가까이 경영에 참여하면서 회사를 도맡아 왔다. 1990년대 초 영업담당 임원으로 삼양식품 경영에 참여한 뒤 경영관리실과 기획조정실 사장 등을 거쳤으며,2005년 부회장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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