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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긋기] 또 하나의 가족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기록.
  • 이민주 기자
  • 등록 2024-06-04 20:01:45
  • 수정 2024-06-05 07: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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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핏연구소=이민주 기자]

또 하나의 가족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기록. 이래호. 청미디어. 2023. 2. 15. 





비료공장 설립과 4.19



규모가 큰 기업을 여러개 가지고 있으면 우리는 기업 집단, 그룹 또는 재벌기업이라고 한다. 재벌이라는 표현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 경제를 지배하던 대기업을 집단으로 지칭하는 표현이다. 


한국은 해방과 한국 전쟁의 과도기를 거쳐 1950년대 중반까지 국가가 소유나 권한을 가지고 있던 국유재산, 귀속재산, 원조물자 배정, 정부발족 사업 등을 민간기업에 이양하였다. 이때 그 분야에 관련있 는 회사나 자본, 경영 능력이 되는 회사가 참여하여 불하받은 후 막

대한 이익을 창출한 기업가의 집단을 재벌이라고 하였다.


정치와 경제가 유착하여 비정상으로 이루어진 형태로 보는 시각도 많았다. 국가는 경제정책을 통하여 국민 복리를 위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기에 1961년 5.16 이후 한국 사회는 삼성을 비롯 삼호 개통, 대표 그룹 등 많은 기업가 집단인 재벌이 탄생되었다.


이병철은 사업의 구상, 분석, 경청, 기획, 실행, 완성 등의 단계별 과정을 중요하게 여겼고, 이 분야에 하늘이 준 남다른 재능과 감각을 갖고 있었다. 자료 수집과 분석 그리고 학습 과정도 중요시 하였지만 이 중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전문가 의견을 듣는 것이었다. 이것

이 이병철의 '경청론'이다. 전문가란 말 그대로 그 분야의 남다른 식견과 지식을 가진 전문인이기에 이병철은 전문가의 의견을 자주 듣는 것을 중요시하였다.



1) 의령에서부터 꿈꾸던 비료공장


1936년 이병철은 아버지로부터 쌀 300석(섬)을 수확하는 규모의 농토를 받아 사업 밑천으로 출발하였다. 그 후 사업이 번창했다. 


이병철은 “농업으로 경제 1960년 이병철은 한국 사회에 필요한 비료 공장를 일으키고, 농업으로 농촌과 설립 계획을 수립하였다. <일러스트 김문식>


농민을 위한 일을 하자. 그것은 비료 공장을 한국에 설치하여 우리 손으로 비료를 생산하는 것이다. 자급자족만이 우리 농촌의 가장 시급한 문제 해결의 하나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당시 비료는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었고, 원조 자금에 의한 수입 품목 중 가장 많은 금액을 차지하였다. 1955년에 착공된 충주비료 공장, 1958년에 착공된 나주비료 공장 등이 있었지만 이 두 공장에서 생산되는 물량으로는 한국 농촌 비료 사용의 1/10의 규모 밖에 감당할



1961년 5월 16일 군사정변이 일어났다. 빈곤에서 벗어나고 부정 부 룹 경영에 패를 추방한다는 명분으로 군사정부는 5월 29일 한국을 대표하는 경 하였던 일 제인 11명을 부정축재 혐의로 구속시키는 등 초긴장의 정치 분위기가 이 책에 되었다. 이 시기 이병철이 일본에 있어 귀국을 하지 않자 국내에서는  부정축재 혐의가 수습되지 않았다.  박태준 은 경제 재건의 필요성을 인식한 군사정부는 이병철에게 여러 가지 신 국가대표 변 약속을 하고 귀국을 요청하였다. 마침내 1961년 6월 26일 이병철 을 하는 것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김포공항에 도착 하자마자 비행기 안까 할 수 있도 지 관계자가 들어와 이병철을 명동에 있는 메트로호텔로 데리고 갔 오늘날 포 다. 다음날 관계자의 안내로 지금의 원호처 청사가 있는 참의원 건물 50대 이 내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실 부속실로 안내되었다. 


박태준은 훗날 포항제철 회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분이다. 박태준의 회 고록에 나온 이병철과의 첫 만남 내용이다. "부정축재 혐의로 몰려 일 본에서 귀국 시기를 조절하면서 기다렸다는 분이 그런 정황과는 반대 로 무슨 훈장을 받으러 온 듯 의연하고 당당했다. ... 경제를 발전시켜 국가와 국민을 구하겠다는 혁명이 기업인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 주어야 한다. 돈 버는 기업인을 죄인 취급하면 국민에게 일시적으로 환심을 살 수 있으나 경제는 발전시킬 수 없다. 서슬 퍼런 국가 최고 권력자 앞에서 누구도 섣불리 꺼낼 수 없는 말을 하였다." 


이병철과 박태준 두 사람은 일본 와세다대학교 중퇴라는 이력도 가 지고 있다. 이날 인연으로 훗날 이병철은 박태준을 자주 불러 삼성그룹 경영에 대한 의견도 묻고, 삼성중공업을 직접 관리해 보라고 제안 하였던 일화도 있다. 


이 책에는 중석불 달러사건, 거평그룹의 대한중석 인수 등의 내용을 앞서 소개하였다. 박태준 회고록에도 대한중석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박태준은 1964년 대한중석 사장으로 취임을 하였다. 박태준은 축구 국가대표 선수가 재정의 어려움으로 시합이 없는 시기에 광산에서 일 을 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계자에게 지시하여 운동선수는 운동만 할 수 있도록 정상적인 대한중석 축구단을 운영하도록 지시하였다. 

오늘날 포스코 축구단의 원조가 되었다. 


50대 이상이면 군대 생활 중 전투화 광을 내는데 필수였던 말표 구두약을 기억할 것이다. 이와 관련된 군납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1966 년 6월 25일 장충체육관에서 복싱선수 김기수와 이탈리아 니노 벤베 또 


새로운 돌파구들 


이병철은 국민소득이 높아지고 생활의 환경이 변함에 따라 전자 관 에 설립 련 소비재 품목의 수요가 늘어날 것을 예측하였다. 전자 공업을 선택 시작하 한 이병철은 1969년 백색가전과 음향기기를 생산하는 삼성전자공업 화학과 주식회사를, 12월에는 흑백 TV와 라디오 수상기를 제조 생산하는 삼 * 하 전기회사를 차례로 설립하였다. 


삼성전관의 당시 전자 제품을 생산하는 대형 기업은 금성사와 대한전선이 중심 공업 자본력이 큰 삼성이 전자 사업에 뛰어들자 전자 제품 생산업 이었다.

 

계는 과잉생산으로 인한 여러 문제점을 제기하며 삼성전자 허가 반대 여론을 형성하였다. 언론사도 과잉생산으로 인한 부작용이 크다며 정부의 허가에 부정적이었다. 


삼성전자의 가전제품 진출은 사돈 관계인 금성사 구인회 회장과의 관계도 불편하게 만들었다. 결국 삼성전자는 생산품 중 일부만 국내 에 공급하고 나머지는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정부에 사업 허가를 받았다. 


(LG는) 1972년 내수용 흑백 TV를 생산하고 1974년에는 세탁기, 냉장고를 생산하였다. 1974년에는 한국반도체를 인수하는 등 반도체 사업에 한 걸음 다가갔다. 1977년에는 컬러 TV를 생산하였다. 


무너진 삼성의 자존심 그리고 변화 1979년 공정거래위원회에서 대한민국 재계 순위를 발표하였다. 또  한국 재계 순위가 형성될 때부터 1위 자리를 지키던 삼성그룹이 현 하나의 

대그룹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다. 더 충격적인 것은 호남석유 등 대형 가족 중공업에 진출한 럭키그룹이 2위로 도약하고 삼성그룹은 3위로 발표됐다. 

 


이병철은 명예와 자존심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변화가 필요하였 다. 큰 결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될 위기를 느꼈다. 이병철은 새로운 첨단산업을 찾기로 하였다. 


그렇다면 이병철에게 첨단산업 기술이란 무엇일까. 한마디로 그것 은 '반도체'였다. 이병철은 "면적이 작고 지하자원도 풍부하지 않은 한 국은 오직 제조와 수출주도 품목의 생산만이 한국경제의 버팀목이 된 다. 이러한 현실에서 한국은 과감한 산업재편을 하여야 하고 첨단산 업 기술을 육성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라고 늘 머릿속에 생각을 가 

지고 있었다. 


1980년 봄, 이병철은 일본의 저명한 경제 전문가 이나바히데조 박 사로부터 반도체 생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주요 내용은 앞으로 살 길은 반도체, 컴퓨터, 유전공학, 우주해양공학을 중심으로 진행될 것이라 하였다. 마음속 깊게 새겨 두었다. 1981년 9월, 이병철은 그룹 

임원회의에서 삼성의 장래에 관해 자신의 견해와 경영관을 밝혔다. 

"앞으로 첨단산업 기술인 반도체와 컴퓨터에 삼성의 흥망을 걸겠다.

 


이병철은 반도체를 알기 위해 공부도 많이 하였다.


1982년, 18년 만에 미국을 방문하였다. 미국 주요 산업 도시와 [BM, GE, HP 등 여러 전자 업체의 현장을 직접 보았다. 국내에서도 전자 산업 전문가들을 초청하여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일본과 미국 에서 나온 컴퓨터에 관한 자료는 구할 수 있을 만큼 구해서 읽었다.

반도체를 이해하고 반도체 사업을 추진하려고 구상을 하니 풀어나가야 할 과제도 많았다. 반도체는 워낙 세밀한 산업이다 보니 기술 수준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고 막대한 자원이 투자되어야 했다. 더구나기술 개발 속도가 무척 빨라 제품의 사이클이 짧은 것도 문제였다.


이병철은 고민에 빠졌다. 내가 만약 반도체 사업을 한다면, 고급 두뇌는 어디서 데려올 것이며, 데려오지 못할 경우 어떻게 육성해야 하는 것일까? 또 공장 부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그 건설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공장 설비에 드는 천문학적인 돈을 어떻게 조달해

야 하는 것일까? 


이병철만이 가진 메모 경영과 경청 경영을 작동시켰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1983년 2월 6일, 이병철은 도쿄의 오쿠라호텔 505호실에서 메모지에 밑줄을 하나하나 그어가고 있었다. 이병철이 반도체 사업을 결심하게 한 것은 단 세줄의 통계에 의한 것이었다. '철강은 톤당 340달러, 석탄은 40달러, 알루미늄은 3,400달러, 텔레비전은 21,300달러

의 부가가치가 있다. 그런데 반도체는 85억달러, 소프트웨어는 톤당426억달러의 부가가치가 있다.' 결심이 섰다. 반도체 관련 계획서를 만들도록 지시를 하였다. 그리고 1983년 3월 15일 중앙일보 홍진기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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