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ffett story] 2회 : 독자적 인생
워렌 버핏의 행복한 월스트리트 생활은 1956년에 전환점을 맞았다.
그 해 그레이엄이 고령을 이유로 30여년간 운영해온 그레이엄&뉴먼의 문을 닫고 주식 투자 현업에서 은퇴한 것이다. 당시 62세이던 그레이엄은 만족스러운 여생을 보낼 수 있는 돈을 벌었던 터였다. 그는 은퇴와 함께 미 동부의 비버리힐스로 거주지를 훌쩍 옮겼다.
이제 버핏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상식적이라면 버핏은 월스트리트에 그대로 남아 있어야 했다.
월스트리트가 어떤 곳인가.
미 뉴욕의 맨해튼을 걷다 보면 남부의 브로드웨이에서 사우스 스트리트까지에 이르는 지역이 나온다. 이곳을 걷다 보면 골드만삭스, JP모건, 씨티그룹 등 세계적 명성이 금융 회사의 본사가 위용을 자랑하며 들어서 있다. 또, 미 뉴욕증권거래소NYSE, 나스닥, 증권거래위원회SEC 같은 증권 기관들이 다닥다닥 들어서 있다. 미국의 금융 중심지이자 세계의 금융 중심지가 월스트리트이다.
세속의 성공을 꿈꾸는 미국의 능력 있고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그래서 월스트리트입성을 꿈꾼다. 돈이 흐르고, 음모과 야망이 넘치고, 일확천금이 실현되는 꿈의 거리가 월스트리트이다. 지금도 세계의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부나방처럼 월스트리트로 몰려들고 있다. 버핏의 고향 오마하의 야심 있는 젊은이들은 일단 뉴욕으로 ‘올라오면’ 고령이 돼서야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일반적이었다. 뉴욕에 성공의 기회가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말은 제주도로, 사람은 서울로”라는 한국 속담은 미국에서도 적용된다.
그런데 버핏은 월스트리트 생활을 접고 귀향했다. 일시적 이주가 아니라 삶의 기반을 아예 인구 10만여명의 소도시 오마하로 옮긴 것이었다. 스물여섯의 야심만만한 젊은이는 왜 고향으로 돌아왔을까.
내가 네브라스카에 정착하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이곳이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네브라스카의 전문화한 기업환경은 어떤 형태의 사업이건 진정한 의미에서 경제적 타당성을 보장해준다. 또 이미 잘 알려진 대로 네브라스카의 특징인 맑은 공기와 낮은 범죄율, 좋은 학군, 그리고 중서부 지방 특유의 직업 윤리 등 더할 나위없이 완전한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버핏은 1996년 8월 오마하 지역 신문 <오마하 월드 해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행한 의례적인 표현으로 보인다.
당시의 버핏의 다른 발언을 뒤져보면 버핏은 월스트리트 주식 시장의 변덕과 광기에 염증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또 내면의 가치를 중시하고 내향적인 성격을 가진 버핏은 월스트리트의 말초적이고 표피적인 인간 관계에 불편함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버핏은 내성적인 성격과 대중 공포증을 극복하기 위해 카네기 재단에서 스피킹 코스를 수강한 적이 있다.
확실한 것은 버핏이 세속의 기준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귀향한 버핏은 투자자를 모았다. 1956년 5월 1일, 버핏은 오마하에서 투자 파트너 회사인 버핏 어소시에츠 Buffet Associates를 설립했다. 4명의 가족과 3명의 친구에게서 투자받은 10만 5,000달러에 버핏이 100달러를 보태 모두 10만 5,100달러의 종자돈이 만들어졌다 .
역사상 전무후무한 전설의 투자 기록이 만들어지는 출발점이었다.
그는 투자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운영원칙을 공개했다.
- 적당한 가격의 주식을 찾아 기꺼이 투자한다.
- 미 재무부 채권(국채) 수익률인 6%를 넘어서는 수익률을 올리지 못하면 버핏은 단 1%의 수수료도 받지 않는다.
- 버핏이 받는 연간 수수료는 전체 수익률 중에서 미 재무부 채권 수익률인 6%를 제외한 수익의 25%이다.
- 투자자들은 버핏의 투자법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 투자자들이 질문을 해와도 버핏은 대답할 의무가 없다.
- 버핏은 1년에 한두번만 새로운 종목에 투자한다.
버핏 어소시에츠의 투자 수익률은 기대 이상이었다. 57년부터 69년까지 13년간 버핏은 29.5%의 연평균 수익률을 기록했다. 이는 1만달러가 13년이 지나 30만달러로 불어난 것을 의미한다. 1,000만원이 3억원으로 불어난 셈이다.
“버핏에게 투자하면 돈을 불릴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오마하의 지역 유지들이 너도 나도 돈을 맡기자 버핏은 버핏 어소시에츠 외에 버핏 펀드, 언더우드 등 7개의 파트너십을 동시에 운영하다가 61년에 버핏 투자 조합이라는 이름으로 통합했다.
<버핏 투자조합과 다우지수 연수익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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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다우지수 버핏 버핏 초기 자금에서
상승률 투자조합(A) 투자조합(B) 늘어난 자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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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8.4% 10.4% 9.3% 115,920
1958 38.5% 40.9% 32.2% 163,331
1959 20.0% 25.9% 20.9% 205,634
1960 -6.2% 22.8% 18.6% 252,519
1961 22.4% 45.9% 35.9% 368,425
1962 -7.6% 13.9% 11.9% 418,636
1963 20.6% 38.7% 30.5% 582,035
1964 18.7% 27.8% 22.3% 743,840
1965 14.2% 47.2% 36.9% 1,094,933
1966 -15.6% 20.4% 16.8% 1,318,300
1967 19.0% 35.9% 28.4% 1,791,569
1968 7.7% 58.8% 45.6% 2,845,012
1969 -11.6% 6.8% 3,038,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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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 7.4% 29.5% 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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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핏투자조합(B)의 수익률은 파트너들에게 연간 6%를 분배한 후 이득의 25%에 해당하는 제반 파트너 수수료를 공제하고 나서의 수익률.
주목해야 할 점은 버핏의 초기 투자 수익률 29.5%는 일반 투자자와 똑 같은 조건에서 얻어낸 수익률이라는 점이다.
버핏이 투자조합을 결성한 시기인 1956년 1월의 다우지수는 511이었는데 이듬해인 57년 1월의 다우지수는 474로 오히려 떨어졌다. 그 해 10월에 다우지수는 435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1956~1969년의 미국의 주식시장은 일시적인 강세장이 있기는 했지만 전반적으로 좋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기간이었다.
이렇게 장세가 그저 그랬던 이유는 당시의 미국의 정치 경제 상황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1957년 10월 4일 당시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은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해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소련의 팽창주의가 진행되면서 미국에 공산주의가 전염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고 마녀사냥식 공산주의자 색출작업이 벌어졌다.
이듬해인 58년에는 미 경제에 불황이 엄습해 기업들이 잇따라 도산했고, 59년에는 미국의 안마당 쿠바에 카스트로 혁명 정권이 들어서 미국인들을 극도로 불안하게 했다.
그럼에도 버핏이 증시의 등락에 영향을 받지 않고 성과를 거둔 비결은 뭘까. 그것의 기업의 내재가치를 보고 투자를 결정한 것에 있다.
버핏은 1960년대 초반 샌본Sanborn 지도 제작 회사가 투자조합 자산의 35%를 차지한다고 발표하면서 주식 시장에서의 이 회사의 주가는 주당 45달러이지만 적정 주가는 주당 65달러라고 밝혔다. 샌본은 화재 보험, 도시 계획과 정비, 지리 연구 등에 필수적인 지리 정보를 제공하는 회사였다.
샌본 말고도 버핏이 주식을 매입한 기업은 록우드 코코아Rockwood Cocoa, 아카타Arcata, 웨스턴 천연가스Western natural gas, 뎀스터 밀Dempster Mill, 블루칩 스템스Blue Chip Stamps, 호치스차일드Hochschild 였다.
1961년 버핏은 처음으로 백만장자가 됐다. 그의 나이 서른한살이었다(생일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서른살이었다).
그는 빌딩에서 뛰어 내릴 필요가 없었다.
버핏의 재산 추이(괄호안은 버핏의 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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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버핏의 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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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 100
1961 1,000.000
1962 1,500,000
1963 2,500,000
1964 3,500,000
1965 7,000,000
1966 8,000,000
1967 11,000,000
1968 25,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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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 버핏이 파트너에게 발송한 편지
1969년 말 서른아홉의 버핏이 투자조합을 해산했을 때 그의 재산은 2,500만달러(약 250억원)로 불어나 있었다. 평생동안 부족함이 없는 부를 마흔이 되기 전에 쌓은 것이다. 월스트리트에서 오마하로 삶의 터전을 옮긴 지 14년만의 성취였다.
그러나 이 성취가 전설의 투자 인생의 서막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버핏 자신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COPYRIGHT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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