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E라는 놀라운 개념
사람들 사이의 다툼을 해결하는 방법과 관련하여 ENE(Early Neutral Evaluation, 조기중립평가)라는 놀라운 개념이 있다. 이것은 소송이 제기되면 법원이 중립평가인(neutral evaluator)을 선정하여 그 소송의 주요 쟁점, 승소여부, 소요비용 등을 당사자들에게 미리 알려주어 당사자들이 결과를 예측하게 한 후 소송을 더 진행할지 아니면 중간에 서로 화해하고 합의할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게 하는 절차이다.*
이 절차를 법률로 정하고 있는 미국에서는 법원에 소송이 제기되면, 우선 법에 정한 규정에 따라 기계적으로 중립평가 절차로 사건이 회부된다.** 따라서 당사자들은 본격적인 판결에 이르기 전에 결과를 대체로 알 수 있어서 합리적인 행동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소송 천국인 미국에서, 소송사건 중 3%만이 판결까지 간다거나 전체 소송의 1% 정도만 최종 판결까지 간다고 하는 놀라운 자료들이 나오는 것은 대체로 ENE를 활용하는 미국인들의 지혜에 기인하는 것이다.
ENE에 담긴 수학적 지혜와 선거
ENE의 지혜는 본격적인 판결이 나오기 전에 당사자들에게 중립적인 전문가의 평가를 들어보게 하여 합리적이고 현명한 결정을 하도록 한다는 데 있다. ENE의 지혜는 바로 수학적 지혜이다. 확률 개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바로 이 ENE의 지혜가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국가의 운명이 걸린 총선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오는 4.15총선은 정당의 대결이라기보다는 자유시장주의자 진영과 사회주의자 진영의 대결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유시장주의자들이 더 많은 표를 얻으면 개인은 더 많은 자유를 누리고 경제는 동력을 얻을 것이고, 사회주의자들이 더 많은 표를 얻으면 개인의 자유는 제약이 많아지고 세금 부담은 더 늘어나며 경제는 쇠퇴의 길로 접어들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화려한 행렬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냉엄한 결과이다.
선거라는 것은 한 표라도 많이 득표한 사람에게 전부의 권한을 부여한다. 그런데 어느 진영이 선거에 이길 것인지는 수학이 간단히 말해준다. 이길 수 있는 확률을 높이는 진영이 이길 수 있다. 이 수학의 간단한 이치를 무시하는 진영은 패배할 것이요, 이를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진영은 승리할 것이다.
ENE의 지혜를 무시한 2014년 6.4 지방선거
2014년의 6.4 지방선거는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울의 경우 당시 보수진영에서는 지지 가능 표 54.9% 중에서 3위인 고승덕 후보가 24.3%를 가져감으로써 선거의 승리를 진보진영으로 넘겨주었다. ENE적 관점에서 살펴보면 끝까지 분열로 가는 것보다 중간에 합의하여 해결하는 것이 보수진영에 도움이 되었다. 다른 지역도 동일하다.
ENE의 지혜에 충실했던 2019년 4.3 창원 성산구 국회의원 보궐선거
반대의 경우도 있다. 2019년 경남 창원 성산구에서 치러진 4.3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ENE적 지혜에 충실했던 진보진영이 승리했다.
<표 2>는 자유한국당 강기윤 후보가 32.5%, 정의당 여영국 후보가 21.5%, 더불어민주당 권민호 후보가14.3%, 민중당 손석형 후보가 11.2%의 예상 지지율을 얻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보수진영의 승리가 눈에 보인다.
영리하게도 진보진영에서는 2위인 정의당 여영국 후보와 3위인 더불어민주당 권민호 후보가 다시 여러 차례의 여론 조사를 바탕으로 후보 단일화를 실시하였다.
반대로 보수진영에서는 2019년 3월 14일에 대한애국당의 진순정 후보가 후보자 등록을 하여 선거의 수학적 지혜에 도전장을 던졌다. 그 출마 선언서에서 “잃어버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구출하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찾기 위해......”라는 거창한 보수의 깃발을 높이 들고 기세 좋게 후보 등록을 하였지만 결과는 보수 표의 분산으로 인하여 보수진영의 선거 패배에 크게 기여하였다.***
후보 단일화를 한 정의당은 대한애국당의 돌연한 출마 선언으로 운 좋게도 42,633표를 얻어 겨우 474표의 차이로 승리하였다. 오히려 자유한국당과 대한애국당이 후보 단일화를 하였으면, 총 42,997표로 자유한국당이 미미하지만 364표 차이로 승리할 수 있었다.
ENE에 담긴 수학적 지혜가 남긴 교훈
수학적 지혜에 도전하는 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것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눈으로 뻔히 보고도 욕심을 부린다.**** 어리석은 일이다.
<그림 1>에서 보는 것처럼, 선거 전 마지막 설문조사에서 나타난 후보별 지지도는 조사기관에 따라 일정하지 않다. 설문조사는 ENE에서 중립평가인이 내리는 판단보다 훨씬 적중률이 낮을 수 있지만, 이것은 조사방법의 한계 때문에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더욱 선거에 임하는 사람들은 수학적 지혜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수학적으로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ENE 절차는 당사자의 일방 또는 쌍방이 사건의 평가나 재평가에 대해서 비현실적인 기대를 포함하고 있는 사건, 당사자가 완고하고 사리에 어두워서 변호사의 충고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건 등에 특히 효과적이다.***** 그래서 이기적 계산에 눈이 어두워 비현실적인 기대와 완고한 후보들이 득실거리는 우리나라 정치 현장에서 ENE의 지혜는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4.15 총선에서 어느 진영이 수학적 지혜에 충실 하느냐에 따라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 나라의 운명이 수학에 달려 있다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주석]
* 이에 관해서 자세한 것은 박철규, 『대체적 분쟁해결 총론』, 도서출판 오래, 2016, 104면 이하; 서순복, “미국의 법원부속형 대체적 분쟁해결제도에 관한 탐색적 연구”, 「미국헌법연구」 제26권 제2호, 2015, 163면 이하 참조.
** 서순복, 위의 논문, 184면.
*** 최종 선거 결과는 자유한국당 강기윤 42,159표 45.21%, 바른미래당 이재환 3,334표 3.57%로 정의당 여영국 42,633표 45.75%, 민중당 손석현 3,540표 3.79%, 대한애국당 진순정 838표 0.89%, 무소속 김종서 706표 0.75%, 총 93,240표였다.
**** 이 선거에서 대한애국당 후보의 출마선언은 기껏해야 대한애국당의 존재를 알리거나, 후보자를 지역구에 알려 후보자의 정치적 지명도를 다소 높여주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보수진영의 표를 분산시켜 보수진영 후보자의 당선에 대한 수학적 확률을 떨어뜨려 보수진영이 선거에서 패배하는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였다.
***** 서순복, 앞의 논문, 1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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