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밑줄긋기] 대한민국 돈의 역사. 홍춘욱
  • 이민주 기자
  • 등록 2024-06-03 23:15:22
  • 목록 바로가기목록으로
  • 링크복사
  • 댓글
  • 인쇄
  • 폰트 키우기 폰트 줄이기

기사수정
[버핏연구소=이민주 기자]

대한민국 돈의 역사. 홍춘욱. 상상스퀘어. 2023. 7. 17. 




미국 정부는 이승만 정부에게 투명한 원조 자금의 관리와 일 본과의 교역 확대를 권고했지만, 두 가지 모두 실현되지 않았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및 무역 거래는 이승만 정부가 직을 걸고 반대했던 데다, 현물로 지급되는 각종 물자는 이승만 정부의 정치자금으로 활용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주한 미국 대사관은 이승만 정부가 비밀리에 비료업자와 결탁하여 농민에게 비료를 비싼 가격에 판매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26 이승만 정부는 미국이 무상으로 제공하는 비료의 상당 부분을 정부 보관 창고에서 몰래 개인 비료업자에게 빼돌리고, 이를 다시 농민에게 높은

가격에 판매하면서 수입을 챙겼던 것이다. 또한 국가가 보유하

고 있는 비료 판매를 제한하면서 농민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높

은 가격의 비료를 구입할 수밖에 없었다. 정부가 판매하는 값싼

비료를 구입하기 위해서 기다렸다가 비료를 사용할 시기를 놓치 는 농민들이 허다했다.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되고 농민의 불만까지 높아지자, 이승만 정부로서도 대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 이승만 정

부가 꺼내든 카드는 바로 적산 매각이었다. 적산은 조선총독부

와 일본인이 보유한 토지와 기업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 가운

데 토지는 미군정이 1947년에 매각했으니, 남은 것은 기업체였다. 


적산 기업은 노동자의 숫자나 생산액을 기준으로 볼 때 경제 전체의 1/3~1/2에 이르는 막대한 수준이었다.  


적산 기업을 민간에게 매각하는 법(귀속 재산 처리법)이 1949 년 12월에 제정되었지만, 곧바로 한국 전쟁이 터져 본격적인 매 

각은 한국 전쟁 이후로 미뤄졌다. 1954년부터 이승만 정부는 군 수 물자 공급을 늘리고 재정 적자를 보충하기 위해 적극적인 매 각에 나섰다. 1958년 5월까지 총 263,774건의 적산이 매각되어 90% 이상 처리가 완료되었다.27 귀속 업체는 생산 시설이 좋 은 대규모 기업이 대부분이었고, 대한석탄공사와 대한조선공사 등 일부 기업만 매각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인 

그러나 한국 전쟁 직후에 적산 매각이 이뤄졌기에 매우 저렴 하게 매각될 수밖에 없었다. 예컨대 조선방직 부산 공장의 경우, 정부가 평가한 가격은 35억 원이었으나 실제 매각액은 22억 원  에 불과하였다.28 삼척 시멘트 공장의 경우 감정가가 7억 원임에 도 판매가는 4억 5,000만 원에 그쳤다. 귀속 사업체의 매각 가격 은 책정 가격에 비해 평균 62% 수준이었다. 더 나아가 15년 동 안 분할 납부하게 되어 있었고, 이마저도 은행의 특혜 대출을 받 

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흥은행 등 당시 5대 시중 은행의 대출에서 15대 재벌이 차지하는 비중이 1953년 1~5% 수준에서  1960년 10~30% 수준으로 높아졌던 것이 이를 방증한다.

 

특히 한국 전쟁 이후 물가가 수십 배 상승하는 동안 15년에  걸쳐 매각 대금을 갚았기에, 귀속 재산을 매수한 이들은 엄청난  차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로 인해 적산 매각은 정경 유착과 부 패의 온상으로 여론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적산 매각이 한국 경제의 성장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왜냐하면 이때를 고비로 제조업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었기 때 문이다. 제일 먼저 성장 궤도에 올라탄 것은 이른바 '3백 산업(밀 가루, 설탕, 방직) '으로 식료품은 연 15.7%, 방직은 10.9%의 연평 균 성장률을 기록했다.


적산 매각이 경제 성장으로 연결된 이유는 산업 자본의 형성 에서 찾을 수 있다. 아무리 헐값이라 해도 적산을 매입할 돈을 지닌 계층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더 나아가 전쟁이 막 끝나 미래 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임에도 거액을 투자했다는 것은 그 만큼 야성적 충동'을 지닌 인물들이었음을 시사한다. 야성적 충 동은 기업가들이 불확실성이 높은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투자하 고 또 미래를 선점하기 위해 나서는 것을 지칭한다. 자산을 일구 는 순간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이 돈을 잘 운용할 것인지에 집중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극소수의 사람들은 더 빠른 성 장을 위해 공격적으로 투자하고 또 모험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 인다. 


물론 가족들 입장에서는 가장의 이런 행동이 매우 불안하 게 보이겠지만, 나라가 성장하기 위해서는 야성적 충동을 지닌 기업들을 육성하고 또 보호해 주어야 한다. 기업이 성장해야 고 용이 늘어날 것이며, 생산성도 향상되어 글로벌 경쟁에서 승리 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극성을 지닌 기업가만으로 경제가 성장할 수는 없 다. 물건을 사줄 고객이 없다면 아무리 좋은 물건을 만들어도 쓸 모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구매자이자 원재 료 공급자로 나선 것이 정부였다. 먼저 구매자로서 한국 정부는 적산 매각 자금과 해외 원조 덕분에 적극적인 재정 집행이 가능 했다. 1953~1960년 동안 한국 정부는 수입의 72.5%를 원조에  의존했는데, 특히 미국의 원조로 제공되는 물건을 국내에 판매 

하여 얻은 수입이 약 70%에 이를 정도로 압도적이었다.31 

정부는 기업이 필요로 하는 핵심 원재료의 공급에서도 큰 역 

할을 담당했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미국 정부는 이른바 '잉여 농산물'을 원조해, 그 규모가 1억 6,425만 달러에 달했으며,  


이 가운데 밀이 40%, 원면이 11.1%를 차지하고 있었다.32 이 덕 분에 3백 산업을 비롯한 내수 기업들의 성과가 크게 개선되었 으며, 1950년대 후반 방직 공업은 공급 과잉의 조짐마저 나타났 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수출로 돌아서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산적해 있었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이 수출에 동의하지 않 았다는 점이다. 미국은 원조를 통해 공급된 원면으로 생산된 제 품을 다른 나라에 수출하는 것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더 나아가 이승만 정부가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적정 수준보다 낮게 유지한 것도 수출의 어려움을 높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승만 정부는 1950년대 중반 달러에 대한 원화 환율을 1대 500으로 책정했는데, 미국인 경제 고문들이 바람직한 환율은 1 대 1,000이라고 여러 차례 조언했음에도 이를 수정하지 않았다  (1962년 화폐 개혁으로 10환이 1원이 되었기에, 1달러=100원으로 볼 수 있다). 주한 미국 대사관의 경제 고문 크롱크Edwin Cronk는 한국 정부가 이처럼 원화의 가치를 높게 유지했기 때문에 "수출은 오 히려 손해였다."라며, 당시의 환율로는 수출업자들이 "인건비나 

원재료비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라고 평가했다. 


여기에 부응해 한국 정부 역시 이전처럼 차관 인가를 남발하고 일본 정부에 승인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 일본이 제시한 연간 한도에 맞 춰 차관 우선순위 사업을 선별해 일본 정부와 사전에 교섭하기 로 했다. 신규 2억 달러 차관 사업마저 배정이 완료되자 1970년  제4차 한일 정기 각료 회담에서는 매년 연간 6,000만 달러 선에 맞춰 프로젝트별로 상의하여 상업 차관을 추가 공여키로 합의했 다.

이와 같은 대규모 차관 도입이 경제 성장에 큰 도움이 되기는  했지만, 여러 문제를 일으켰다. 가장 큰 문제는 "좋은 투자 프로 젝트가 넘쳐나느냐?"이다. 앞의 사례에서 기업가 A는 연간 20%  의 수익을 예상하는 사업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었지만, 다른 기 

업가 B가 가진 프로젝트는 연 수익률이 10%에 불과하고 수익 의 신뢰성도 높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저금리의 차관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하더라도 얼마든지 부실 위험이 존재한다. 특히 1969년을 전후해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 패전'의 가능성이 높아 진 것이 위험을 더욱 부추겼다. 1968년 베트남 파병 미군은 54.8 만 명으로 정점을 찍은 후, 1969년에는 47.6만 명으로 줄어들었  고, 1970년에는 34.5만 명 그리고 1972년에는 3만 명으로 급감 

했다.89 따라서 한국군 파병 규모도 1968년 5만 명에서 1972년 에는 3.7만 명으로 줄어들고, 베트남 호황도 막을 내리게 된다.

 


돈을 많이 빌려 공격적으로 투자했는데 경기가 나빠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기업의 수익성이 악화되는 것은 물론이고, 매출액  에서 차지하는 이자 등 각종 금융 비용 부담이 폭발적으로 상승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저금리의 차관을 제때 받을 수 없는 상황에 

서 기업들이 담보 없이 신속하게 돈을 빌릴 수 있는 사채에 외지 했기 때문이다. 한국은행의 1971년 조사에 따르면, 기업의 90% 이상이 월평균 4% 정도의 금리로 사채를 이용하고 있었다. 일본 상사의 공격적인 대출 주선 그리고 기업들의 지나친 낙 관이 한데 어울려 대규모 기업 부실 사태를 낳은 셈이다.  


대비 금융 비용이 10% 선까지 치솟는 상황에서 부실기업 문제가 부각되자, 박정희 정부는 1972년 '8.3 사채 동결 조치'를 취하  기에 이르렀는데, 핵심 내용은 아래와 같다.91 

첫째, 1972년 8월 2일 현재,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사채를 일주일 내에 전부 신고하는 한편 사채의 이자율을 은행 금리 수준 (연 16.2%) 으로 인하하고 원금은 3년 거치 5년 분할 상환한다. [중략] 


둘째, 은행 등 금융 기관이 기업에 대출한 자금 중 단기성 대출 금의 30%를 장기 저리 자금으로 대환한다. [중략]  


셋째, 은행을 이용할 수 없었던 저신용/무담보의 중소 상공업 자 및 농림·수산업자를 위해 신용 보증 제도를 마련한다. [중 략]

 

넷째, 산업 합리화를 위한 자금 500억 원을 조성하여 산업 합 리화 기준에 맞는 기업에 장기 저리로 대출한다.  


1997년에 발생했던 외환 위기의 원인을 둘러싸고 여러 주장 이 있지만, 필자는 1972년의 사채 동결 조치가 가장 중요한 배 경에 있다고 판단한다. 연이율 40% 이상의 사채를 은행 대출 금 리 수준(16.2%)으로 인하하고 3년 동안 갚지 않아도 되며 이후 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한다는 것은 너무나 큰 특혜였고, 이는 한국 기업들이 부채에 의지한 '브레이크 없는' 성장 전략을 더욱 강하  게 추종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8.3 조치 이후 기업들 

의 경영 실적은 크게 개선된 반면, 금융 비용 부담률은 5% 아래 

로 떨어졌다. 


그러나 기업들의 반대편, 즉 가계와 자산가들의 입장에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나 다름 없었다. 은행 이자율이 인플레이션  수준보다도 낮은 상황에서 예금자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기보다  사채 시장에서 운용하는 게 훨씬 이익이었다. 특히 자본 시장의 

발달이 미약해 안정적인 배당을 기대하기 어려웠던 70년대 초에 는 저축 자금을 고리 사채로 운용하는 것이 가장 수익이 높고 안 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8.3 조치로 자금이 묶이고 심 지어 낮은 금리밖에 받지 못하는 상황이 펼쳐졌으니, 정부에 대 

한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더 나아가 이 사건 이후 박정희 정부의 독주가 시작된 것도 경제 전체를 놓고 볼 때 큰 문제가 되었다. 1969년 7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괌에서 이른바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 '을 발표  하며 "동맹국과 우방국의 방위와 발전"을 지속적으로 지원할 예 

정이지만, "모든 자유 국가의 방위를 전담하지는 않겠다."라고 

선언하였다. 더 나아가 주한 미군 중 약 2만 명, 즉 미군 전투 부


 

1992년은 한국 주식 시장의 역사에서 중요한 두 가지 사건이 벌어진 해였다. 첫 번째 사건은 1989년부터 시작된 주식 시장의  하락세가 멈추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한국 주식을 매수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는 점이다. 물론 1980년 

대부터 코리아 펀드 형태로 외국인의 간접적인 한국 주식 매수 

가 가능했다. 그러나 투자자들이 직접 한국 주식을 매입하는 것 은 불가능했고, 코리아 펀드가 폐쇄형 펀드라는 특성이 있었기 에 투자자들의 불편함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이에 노태우 정  부는 1991년 9월 3일에 주식 시장의 점진적인 개방을 발표하고, 

1992년1월 3일부터 시행하였다. 외국인 투자자에 의한 경영권 위협을 막기 위해 정부는 종목 별 외국인 한도를 설정했다. 기관이나 개인 투자자 등 외국인 전 

체 기준으로 상장 기업 지분의 10% 한도 내에서만 투자할 수 있었 으며 금융, 항공, 통신 등은 사업의 공익성을 감안해 지분 한도 가 8%로 제한되었다. 더 나아가 외국인 1인당 투자 한도는 3% 그리고 공익성이 강한 기업에 대한 한도는 1%로 제약되었다. 매 우 타이트한 규제였지만, 외국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의 미래 를 낙관하며 개방 첫해부터 대규모 순매수를 기록했다. 


1992년 한 해 동안의 순매수 규모는 1.5조 원에 달했고, 1993년에는 4.3 조 원까지 확대됨으로써 1992년 여름부터 증시가 본격적인 상 승세로 돌아서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43 

최근에는 외국인 투자자들이 하루에도 1조 원 이상의 순매수 나 순매도를 기록하기에 큰돈이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시 주식 시장의 규모가 최근과 비교할 수 없이 작았기 에, 1992년 말 외국인 투자자의 지분율은 4.9%까지 상승했으며, 1993년에는 무려 9.8%에 이를 정도로 상승했다. 1991년 9월에  만들어진 한도가 종목당 10%였으니 1993년에 이미 대부분의 우량주 주식 투자 한도가 목에 찬 상황이었다. 이 영향으로 1994 년 외국인 투자자들의 순매수 규모가 0.9조 원으로 줄어들자 정 부는 1994년 12월 1일부터 1997년 11 월까지 총 6차례에 걸쳐 투자 한도를 인상해, 외환 위기 직전에는 26%까지 올렸다. 

이상과 같은 외국인 주식 투자 확대는 한국 증시에 두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하자면, 이른바 저평가 우 량 기업 대주주의 지분 규모가 줄어들었기에 배당을 지급해 봐 야 대주주에게 떨어지는 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 는 1984년부터 시작된 주식 시장의 상승 국면에서도 한국 기업 의 배당 수익률이 오히려 떨어졌다는 점이다. 증시 호황 속에 이  뤄진 시가 발행으로 주식 시장에서 넉넉하게 자금을 조달한 후 

입을 닦아버린 셈이다. 


이런 면에서 1992년의 시장 개방은 큰 의미를 갖는다. 외국 인 투자자들은 한국 증시에 저평가된 기업들이 매우 많다는 것  을 알고, PER이 낮은 기업을 집중적으로 매수했기 때문이다. 태 광산업이나 대한화섬 그리고 신영와코루 등 PER이 시장 평균에 비해 크게 낮은 기업들은 외국인 투자자의 집중적인 매수에 힘 입어 적게는 5배 많게는 10배 이상 급등했다. 참고로 PER이 낮 다는 것은 실적에 비해 주가가 낮은 수준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시장 참가자들이 선호하지 않는 기업이라는 것을

뜻한다.


물론 기업의 미래 수익 전망이 밝지 않아서 PER이 낮게 형성 된 기업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태광산업의 경우 신소재 섬유 제품을 만들고 있어 수익성이 높았음에도 저평가되었던 것은 결국 사양 산업에 속한 기업이라는 낙인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판

단된다. 특히 외국인 투자자들의 주식 보유 비중이 높아지는 가운데 기업의 태도가 달라진 것도 저 PER 기업의 주가 상승을 유 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적이 뛰어난 데도 주가가 저평가된것은 시장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탓도 있지만, 주주들이 느끼기

에 "기업 실적이 주식 가격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생각하 게 한 경영진의 태도 문제에서 기인했을 수도 있다. 따라서 외국 인 보유 비중 확대는 기업의 자본 정책을 바꾸고, 이게 다시 재 평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가져온 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식 시장 개방이 한국 증시에 미친 두 번째 영향은 해외에 서 발생한 충격이 즉각 한국 경제에 반영된 것을 들 수 있다.

 

1992년 시장 개방 이전에는 해외에서 발생한 경제 충격이 시간  을 두고 한국 증시에 반영되었으며, 영향력도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1987년 10월 19일에 있었던 블  랙 먼데이Black monday 다 미국 다우존스 산업 평균 지수가 하루에 22% 이상 폭락했지만, 10월 20일에 KOSPI는 단 12포인트 하락 (-2.4%)에 그쳤다. 이렇게 한국 증시가 해외 충격에 영향을 받지 않았던 이유는 해외 시장과 국내 시장의 매매 주체들이 서로 다  른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해외의 플레이어들이 국내 시장 

에 진입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주도주의 동조성이다. 1992년 시장 개방 직후에는 저 PER 주를 비롯한 저평가 기업들에 대한 관  심이 높았지만, 9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부터 미국 나스닥 시장 이 강력한 상승세를 펼치는 가운데 한국 주식 시장에서도 반도 체와 통신 그리고 친환경 분야를 중심으로 주도주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필자가 1996년 국책연구소에서 모 증권사로 직장을  옮겼을 때 가장 뜨거운 분야가 바이오 분야와 반도체 그리고 매 

연을 절감해 주는 장치를 개발한 기업들이었던 기억이 선명하 다. 실제로 창업 초기의 성장 국면에 위치한 기업들이 다수를 이  루는 코스닥 시장이 출범한 것도 1996년 5월의 일이었다. 


그러나 주식 시장 개방이 한국 증시에 긍정적인 영향만 준 것 은 아니었다. 1997년 7월에 발생했던 태국의 외환 위기가 한국 과 홍콩 등 동아시아로 전이되었던 것도 외국인 투자자들의 대 / 규모 순매도가 큰 영향을 미쳤다. 즉 1992년 시장 개방 이후 한 국 증시는 해외 충격에 그대로 노출되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국내 요인이 아무런 중요성을 지니지 않는다는 이야기 는 아니다. 정부의 산업 정책 그리고 한국은행의 통화 정책은 국 내 주식 시장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임이 분명하다. 다만 1992  년 이전에 비해 국내 요인의 중요성이 크게 떨어졌다는 이야기 다. 글로벌 투자자들이 한국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더 나아가 세  계 경제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판단하는 게 투자의 성공 여부를 가르는 잣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필자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의 경제 분석가들이 미국 경제 지표와 시장 흐름을 분석하 느라 밤잠을 못 이루게 된 것은 모두 1992년에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앞으로도 이런 분위기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버핏 리포트] 농심, 라면의 해외진출 모멘텀 지속...하반기 갈수록 기대-NH NH투자증권이 17일 농심(004370)에 대해 유럽 중심의 수출 물량이 크게 증가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라면의 해외진출 모멘텀은 지속되고 있다며 투자의견 ‘매수’와 목표주가 56만원을 유지했다. 농심의 전일 종가는 42만500원이다.  농심의 1분기 연결기준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8725억원(YoY +1%), 영업이익 614억원(-4%)으로 영업이익 ...
  2. [주간뉴스클리핑] 금융증권 [금융]"금고 선정에 ESG 반영"…'원 톱' 농협엔 변수은행·보험사 ‘구원등판’…23조 PF 부실 해결할까제4인뱅 '큰 손' 은행 잡아라…유치 경쟁 가열국내은행 1분기 당기순익 24% 뚝…ELS 배상 직격탄 [증권]은행들의 '10년 전쟁' 나라사랑카드…올해 새 사업자 뽑는다"시중은행 된 대구은행, 디지털 ...
  3. [버핏 리포트] LG, 2Q부터 고공상승 예상-유안타 유안타증권이 24일 LG(003550)에 대해 화학 부문 실적 개선 및 전자 계열사의 이익 고성장을 통해 부진했던 1분기를 뒤로 하고 실적 턴어라운드가 예상된다며 투자의견은 '매수', 목표주가는 12만원으로 평가 유지했다. LG의 전일 종가는 8만600원이다.LG의 올해 1분기 연결기준 매출액은 1조6000억원(YoY -1.5%), 영업이익은 4226억원(YoY -16.3%)이다....
  4. 삼보판지, 포장재주 저PER 1위... 3.11 삼보판지(대표이사 류진호. 023600)가 5월 포장재주 저PER 1위를 기록했다.버핏연구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삼보판지는 5월 포장재주에서 PER 3.11배로 가장 낮았다. 이어 대림제지(017650)(3.98), 아세아제지(002310)(4.85), 대륙제관(004780)(5.05)가 뒤를 이었다.삼보판지는 지난해 매출 5556억원, 영업이익 674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각각 4.54%, 0.3% 감소했.
  5. 세중, 소프트웨어주 저PER 1위... 2.75 세중(대표이사 천신일 김기백. 039310)이 5월 소프트웨어주 저PER 1위를 기록했다.버핏연구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세중은 5월 소프트웨어주에서 PER 2.75배로 가장 낮았다. 이어 지란지교시큐리티(208350)(3.28), 오상자이엘(053980)(3.63), 휴네시온(290270)(5.89)가 뒤를 이었다.세중은 지난해 매출 363억원, 영업이익 12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매출은 4.72%...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