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전선은 1955년 설립 이후 2008년까지 54년동안 단한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우량 기업이었다. 그렇지만 2009년 채권단과 재무개선약정을 맺고 구조조정에 들어갔고, 2013년 오너인 설윤석 대표가 경영권을 내놓았다. 기업의 운명이 경영자의 경영 능력과 비즈니스 환경의 변화에 따라 뀐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한전선의 창업주인 설경동(1903∼1976. 아래 사진)은 평안북도 철산 출생으로15세 때부터 신의주에서 곡물도매상을 시작하였다. 신의주에서 5년간 거주한 뒤 함경북도 청진으로 옮겨 일본인과 합자하여 함북약유주식회사(咸北鰯油株式會社)를 설립하여 전무가 되었으며, 1936년 동해수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사장이 되었다.
이 회사는 1945년까지 어선 70척으로 늘어났고 관련 수산단체에 관여해 활동하였다. 8·15광복 후, 맨몸으로 월남하여 무역을 주도하는 대한선업을 설립하였다. 무역을 하는 한편 적산가옥·토지를 불하받아 팔기도 하다가 원동흥업(遠東興業)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부동산투자를 하였다. 이 회사들이 번창해가자 수원의 성냥공장을 인수하여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성냥업계를 석권하였다.
6·25전쟁으로 전재산을 불태웠으나, 1953년 방직공장을 인수하여 대한방직주식회사를 설립, 사장이 되었다. 당시 방직업은 정책적인 보호를 받고 있어 번창할 수 있었고 정계에도 진출하여 자유당 재정부장이 되었다. 1954년에는 대한전선을 불하받았으며, 1956년에는 대동제당(大東製糖)을 설립하였다. 이후 4·19혁명까지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4·19혁명과 5·16군사정변으로 타격을 받았다.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의 기간산업 건설에 참여할 기회를 얻어 대한전선의 시설확충에 전력하였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텔레비전·냉장고 등 전자제품 생산과 이의 호경기에 힘입어 그의 기업체군은 대한재벌로 불리게 되었다. 고희에 접어들면서 설원식(薛元植)을 비롯한 2세들에게 사업기반을 물려 주고 2선으로 은퇴하였다.그는 북한에서 월남한 실향기업인으로 5·16군사정변 이전까지에 우리나라 10대 재벌에 올라간 자수성가형의 기업가였다.
설원량(薛元亮. 1942~2004. 아래 사진) 회장은 설경동 창업주의 3남으로 대한전선의 중흥기를 이끌었다.
1961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65년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상학과(경영학과)를 졸업하였고, 이어 미국 텍사스주립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였다.
1964년 전선과 금속산업 업체 대한전선(주)에 입사하였고 1968년 상무이사가 되었으며, 1972년 대한전선(주)과 대한종합건설 사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를 맡았고, 1974년에는 대한음향 이사로 활동하였다. 1976년 대한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사장이 되었고 1978년 대한전선 대표이사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대한통신 회장, 전선공업협동조합 이사로 재직하였다. 주력회사 대한전선의 케이블을 국산화하고 해외시장을 개척하였으며 스테인리스강과 알루미늄 사업을 시작하여 국내 전선산업을 주도하였다. 또한 회사가 삼양금속, 대한벌크터미널, 옵토매직 등 7개 계열사를 주도하는 중견그룹으로 성장하는 데 이바지하였다. 국내기간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동탑산업훈장과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대한전선의 위기는 설원량 회장이 2004년 3월 22일 급서거하면서 챶아왔다. 설워량 회장의 장남 설윤석(아래 사진)씨는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에 재학중이었다.
설윤석씨의 나이가 어리다는 점 때문에 대한전선은 전문 경영인 체제에 들어가다. 이때 무분별한 투자와 자산의 부실화가 진행됐다. 2009년 대한전선은 채권단과 재무구조 개선 약정을 맺었다. 2010년 2월 설윤석씨가 2010년 2월 만 29세의 나이에 재계 최연소 부회장이 됐다. 그렇지만 이미 사세는 기울어져 있었다. 2013년 설윤석씨는 대한전선 경영권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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