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Buffett story] 1회 : 돈 버는 100가지 방법을 아는 아이
  • 관리자
  • 등록 2014-09-06 15:47:00
  • 목록 바로가기목록으로
  • 링크복사
  • 댓글
  • 인쇄
  • 폰트 키우기 폰트 줄이기

기사수정

[Buffett story] 1회 : 돈 버는 100가지 방법을 아는 아이

워렌 버핏은 1930년 8월 30일 미국 네브라스카주(州) 오마하에서 태어났다.
현재의 버크셔 해더웨이 사무실이 있는 곳에서 몇 블록 떨어져 있지 않은 산부인과 병원이었다. 아버지는 하워드 호먼 버핏(Howard Homan Buffetㆍ1903~1964), 어머니는 레일라 버핏(1904~1996)이다. 워렌 버핏에게는 누나 도리스 버핏이 있었고 수년 후 여동생 로버타 버핏(버티)가 태어났다.

버핏 가문을 거슬러 올라가면 프랑스의 모직물 직조공 존 버핏이 나온다.
존 버핏은 16세기 종교개혁가 칼뱅(Jean Calvinㆍ1509~1564)이 로마 가톨릭 교회에 맞서 만든 위그노 종파의 교도였다. 상당수 위그노 교도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미국으로 건너왔는데, 존 버핏도 그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17세기초 미국 동부 뉴욕주로 건너와 미국의 버핏 가문을 열었다.

존 버핏의 후손인 시드니 호먼 버핏이 네브라스카주 오마하로 삶의 터전을 옮기면서 오마하의 버핏 가문이 생겼다.
시드니 버핏은 오마하에서 버핏&선 그로서리(Bufffet & Son Grocery)라는 이름의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다가 아들 어니스트 버핏에게 물려줬고, 어니스트 버핏은 워렌 버핏의 아버지인 하워드 버핏을 낳았다. 다시 말해 시드니 호먼 버핏은 워렌 버핏의 증조부가 된다.

워렌 버핏의 할아버지인 어니스트 버핏 시절까지만 해도 버핏 가문은 근근이 입에 풀칠하는 정도였다. 식료품 가게 주인이 큰 돈을 벌 수는 없는 법이다. 워렌 버핏의 할아버지 어니스트 버핏은 가게에서 일하는 점원이나 학생에게 쥐꼬리만한 보수를 주면서 간신히 수지를 맞췄다.

워렌 버핏의 아버지 하워드 버핏이 이런 그저 그런 버핏 가문을 오마하의 지역 유지로 일으켜 세웠다. 하워드 버핏은 식료품 가게 주인의 아들로 태어나 연방 하원의원으로 자수성가했다.
하워드 버핏은 네브라스카대를 졸업하고 주식 중개인으로 일하다 1931년 버핏 포크 & 컴퍼니를 설립해 주식과 투자에 관련된 사업을 했다. 그는 인플레이션 헤지를 원하던 고객들에게 다이아몬드를 팔았다. 이 사업을 통해 적지 않은 재산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64년 암으로 임종하면서 56만 3,293달러의 재산을 남겼다.

그는 정치에 관심이 아주 많아 1942년 공화당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돼 1948년까지 6년간 의정활동을 했고 1950년~52년 2년동안 다시 연방 하원의원을 지냈다.
그는 진지한 성격과 강직한 성품을 가진 인물이었다. 연간 세비가 1만 달러에서 1만 2,500달러로 인상되자 인상분 2,500달러를 미 재무성에 반납한 적도 있다. 하워드 버핏은 오마하에서 부와 권력을 가진 지역 유지로 인정 받았다.

워렌 버핏은 아버지가 자수성가를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랐다.

워렌 버핏이 태어난 1930년의 미국은 대공황으로 경제가 수렁에 빠져 있었다. 아버지 하워드 버핏도 대공황의 여파로 다니던 증권사에서 쫓겨나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좌절과 분노감이 팽배한 미국인들은 1932년 대선에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을 몰아내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후보에게 몰표를 던졌다.
버핏이 초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루스벨트 대통령의 뉴딜 정책으로 미국 경제는 서서히 회복기에 접어들고 버핏 아버지도 사업에 기반을 다지면서 집안 형편이 나아졌다.

워렌 버핏은 단점과 장점이 뚜렷한 아이였다.

그는 수줍음이 많고 사교성이 부족했다. 그러나 숫자와 비즈니스에 관한한 특출한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는 숫자를 기억하고 계산하는 것에 관한한 어느 누구도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1940년대 중반 버핏과 함께 미 수도 워싱턴의 우드로 윌슨 고교를 다니며 단짝으로 지낸 돈 댄리(2002년 사망)는 버핏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당시 버핏은 아버지 하워드 버핏이 연방 하원의원이 당선되면서 워싱턴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워렌은 너트에 볼트를 끼워 맞출줄도 모를 정도로 기계에는 문외한이었다. 그런데 그는 두자리 숫자 20개를 암산으로 더할 수 있는 재주를 갖고 있었다. 워렌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읽은 경제서적만 100권이 넘을 것이다.”

일찌감치 버핏의 성공을 확신한 돈 댄리는 1961년 버핏 투자조합에 2만 5,000달러를 투자했다. 그는 이 과정에서 얻은 버크셔 해더웨이 주식을 팔지 않았기 때문에 억만장자가 됐다. 돈 댄리는 40년이 넘도록 매일 아침 버크셔 해더웨이의 주가를 확인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

버핏은 주식 중개인이었던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주식을 배웠다. 8세 때부터 아버지 하워드 버핏이 보고 있던 주식에 관련된 책들을 탐독했고 11세에는 석유회사 시티 서비스 주식을 매입하기도 했다.

13세가 되자 그는 가족들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 선언했다.

“30세에 백만장자가 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오마하의 가장 높은 빌딩에서 뛰어 내릴 것이다.” (그는 정확히 1961년에 백만장자가 됐다. 생일을 기준으로 나이를 계산하는 미국식 기준에 따르면 정확히 서른 살의 일이었다)

버핏은 사업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가 고교 재학 시절 중고차 임대업, 게임기 대여, 농지 임대 사업을 했다는 사실은 제법 알려져 있다.

버핏은 17세 때 돈 댄리와 함께 중고 핀볼 게임기 대여 사업을 했다.
두 10대는 중고 게임기를 구입해 깨끗이 수리해 위스콘신에 있는 어느 이발소에 설치했다. 이발을 하러 온 손님들이 기다리는 시간에 게임을 하도록 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이발소 가게 주인에게는 수익의 20%를 주기로 합의했다.
게임기를 설치한 다음날에 이 게임기는 10달러를 벌었다. 이 가운데 2달러를 이발소 주인에게 주었더니 두 젊은 사업가에게는 8달러의 현금이 생겼다. 1개월이면 208달러, 1년이면 2,496달러라는 계산이 나온다. 해마다 2,496달러를 벌어들이는 사업의 현재가치는 2만 4,960달러이다 .

핀볼 게임기를 매입하는 데 들어간 돈은 35달러. 제법 남는 장사인 것이다.
이발소 가게에 핀볼 게임기를 설치하면 부대 수입이 짭짤하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다른 이발소 가게 주인도 버핏과 돈 댄리에게 핀볼 게임기를 설치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자 버핏은 “윌슨 사장과 상의해보겠다”고 둘러댔다. 윌슨 사장은 존재하지 않는 사장이었다.

게임기가 7대로 불었고 버핏과 돈 댄리는 일주일에 50달러를 벌었다.
버핏은 이런 경험을 통해 비즈니스의 원리를 깨우친 것으로 보인다.

“인생이 이렇게 멋진 것인 줄 미쳐 몰랐습니다.”

두 젊은 사업가는 고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7년 8월에 핀볼 게임기 사업을 어느 퇴역 군인에게 1,200달러에 양도했다. 대학 진학을 위해 사업을 접은 것이다. 그해 버핏은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의 학부 과정에 진학했다. 이 무렵 버핏은 주식 투자와 비즈니스에 관해 전문가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

네브라스카대 링컨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해인 1950년 버핏은 컬럼비아대 경영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평생의 스승인 벤저민 그레이엄을 만난다. 버핏에 관련된 자료나 인터뷰를 읽어보면 버핏은 벤저민 그레이엄, 필립 피셔, 찰스 멍거를 존경할만한 지적 스승으로 언급하고 있다. 특히 벤저민 그레이엄에 대한 찬사는 언제나 최상급이다. 후일 자신의 첫아들의 중간 이름에 그레이엄을 넣을 정도였다. 버핏의 첫 아들의 이름은 하워드 그레이엄 버핏이다.

“인간이 가진 무수한 나침반중에 벤저민 그레이엄이야말로 가장 정확하게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이다.”

버핏은 그레이엄의 강의에 푹 빠졌다. 천재가 열정을 갖고 집중한 과목의 성적이 나쁘게 나올 이유가 없었다. 버핏은 그레이엄 교수가 가르친 모든 과목에서 최고 성적인 A플러스를 받았다.

이듬해인 1951년 컬럼비아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한 버핏은 그레이엄이 운영하는 투자 회사 그레이엄&뉴먼에 입사하기를 열망했다. 버핏은 심지어 그레이엄에게 무보수로 일하겠다고 자청했다. 돈에 관한한 한치의 양보가 없는 버핏이 무보수를 제의했으니 그가 얼마나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버핏의 제안을 거절했다. 버핏의 능력이 실제보다 과대평가됐다는 게 이유였다. 그레이엄은 가치에 관한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었다 ”

“벤저민 그레이엄은 대학 졸업후 무보수로 일하겠다는 내 제의를 거절했다. 대신 그는 시어스와 로벅(미국의 대표적인 유통업체인 시어스 로벅의 설립자)을 거상으로 키워낸 줄리어스 로젠왈드의 아들인 빌 로젠왈드에게 나를 추천했고, 나는 그 일가를 위해 일할 의사가 있는지를 타진하는 예비 서신까지 받았다. 그러나 당시 나는 군복무 문제로 오마하를 떠날 수 없었다. 벤저민이 정말로 나를 추천한 것인지, 아니면 성가시게 구는 나를 떼어내려고 한 것인지는 앞으로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버핏은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954년 8월에야 그레이엄으로부터 그레이엄&뉴먼에서 일할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당시 버핏은 고향 오마하로 돌아가 아버지의 주식 중개 회사인 버핏 포크 & 컴퍼니에서 증권 세일즈맨으로 3년째 일하고 있었다. 버핏이 조르고 조르자 입사를 허락한 것이었다.

버핏은 이 시절이 만족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자신이 그렇게도 원하던 가치투자의 실제적 지식을 스승인 그레이엄으로부터 직접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레이엄의 <증권분석>을 읽고서 머리에 섬광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던 버핏이 직접 책의 지은이로부터 실제적 지식을 전수받는 것은 무엇과도 바꾸기 어려운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연봉도 적은 편은 아니었다. 버핏의 당시 연봉 1만 2,000달러는 이 일대 뉴욕의 교사 초봉인 연 5,000달러의 배 이상이었다. 버핏은 저녁에는 스카스데일이라는 직업학교에서 투자 관련 강의를 하면서 추가로 돈을 모을 수 있었다.

“나는 이 회사에서 그레이엄 뉴먼, 뉴먼 앤 그레이엄이라는 두 부서에서 각각 업무를 수행했는데, 그레이엄 뉴먼에서는 일반적인 투자 업무를 했고, 뉴먼 앤 그레이엄에서는 오늘날 우리가 헤지펀드로 부르는 업무를 했다. 국제증권 및 외환 시장에 투자해 단기 이익을 올리는 업무였다. 두가지를 합친 운영자금의 규모가 1,200만달러 가량이었다.“

투자 회사였던 그레이엄&뉴먼은 리스크가 적으면서 수익률이 20% 이상이면 투자에 나섰다. 장부가치가 저평가된 주식에 대한 투자, 차익 거래Arbitrage가 주된 투자 방법이었다.

그레이엄&뉴먼은 어느 기업의 보통주가 순유동자산의 3분의 2 이하로 거래되면 저평가된 것으로 보고 매입했다.
이 회사는 차익거래도 빈번하게 수행했다. 차익거래란 쉽게 말해 하나의 주식이 A 시장에서는 110원, B 시장에서는 100원에 거래되고 있다면 B 시장에서 주식을 100원에 매입해 A 시장에 내다파는 것을 말한다. 수익률은 높지 않지만 리스크가 낮다는 장점이 있다.
버핏은 이 회사에 근무하면서 1926년부터 1956년사이의 차익거래를 세밀히 연구를 하면서 이 투자 방식의 장점에 매료됐다. 그는 투자 초기에 차익거래를 빈번히 활용했다.

개인적으로도 버핏은 행복했다.
버핏은 부인 수잔 톰슨과 함께 맨해튼의 월 65달러 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신접살림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수전 버핏(수지), 하워드 버핏의 1남 1녀가 있었다. 큰 딸 수지는 버핏 부부가 결혼한지 1년이 지난 1953년에 태어났고, 이듬해인 1954년에 첫 아들 하워드가 출생했다.
만족스러운 일과 직장, 존경하는 스승,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귀여운 자녀들… 버핏은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버핏의 개인 저축액도 14만달러를 넘었다 .
그러나 맨해튼의 어느 투자 회사에 다니는 버핏이 훗날 세계 최고 부자가 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COPYRIGHT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ihs_buffett@naver.com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바텍, 건강관리장비와용품주 저PER 1위...6.35배 바텍(대표이사 김선범. 043150)이 11월 건강관리장비와용품주 저PER 1위를 기록했다.버핏연구소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바텍은 11월 건강관리장비와용품주 PER 6.35배로 가장 낮았다. 이어 레이언스(228850)(6.47), 디알젬(263690)(7.55), 세운메디칼(100700)(8.41)가 뒤를 이었다.바텍은 지난 3분기 매출액 873억원, 영업이익 125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각.
  2. CJ CGV, 3Q 매출액 5470억 전년比 34.9%↑..."CJ올리브네트웍스 시너지가 실적 견인" CJ CGV(대표이사 허민회, 079160)가 올해 3분기 매출액 5470억원, 영업이익 321억원을 기록했다고 8일 공시했다(이하 K-IFRS 연결). 전년 동기 대비 각각 34.9%, 5.2% 증가했다. 지난 6월 자회사로 편입된 CJ올리브네트웍스와의 시너지가 본격화되며 호실적을 견인했다.올리브네트웍스는 매출 1830억원, 영업이익 164억원을 기록했다. 대외사업 수주 확대 및...
  3. 코웨이, 3Q 매출액 1.1조 전년比 9.2%↑..."동남아 매출이 성장 견인" 코웨이(대표이사 서장원, 021240)가 3분기 매출액 1조1003억원, 영업이익 2071억원을 기록했다고 공시했다(K-IFRS 연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9.2%, 6% 증가한 수치다. 코웨이는 3분기 국내 사업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9.9% 증가한 6608억원이라고 밝혔다. 이는 여름철 아이콘 얼음정수기 판매 확대와 비렉스(BEREX) 매트리스 및 안마의자의 꾸준한 ..
  4. 네이버, 3Q 매출액 2.7조 전년동기 比 11.1%↑..."검색 및 광고사업 호조" 네이버(대표이사 사장 최수연, 035420:NAVER)가 3분기 매출액  2조7156억원, 영업이익 5253억원을 기록했다고 8일 공시했다(이하 K-IFRS 연결). 전년동기대비 매출액과 영업이익은 각각 전년동기 대비 11.1%, 38.2% 상승했다. 숏폼, 피드 서비스를 통한 체류시간 광고 상품 개선 등으로 발생한 검색 및 광고사업의 호조세가 실적을 견인했다는 분석이...
  5. 휴온스, 3Q 영업익 87억...전년동기比 41.9%↓ 휴온스(대표이사 송수영 윤상배, 243070)가 3분기 매출액 1469억원, 영업이익 87억원을 기록했다고 8일 공시했다(이하 K-IFRS 연결). 전년동기대비 매출액은 6.3% 증가했고, 영업이익은 41.9% 감소했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반영이 시작된 2공장 관련 비용과 상대적으로 원가율이 높은 품목의 매출 비중이 늘며 매출원가율이 상승했으나, 외형 성장은 ..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