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신화경영의 대가. 김찬웅. 세종미디어(이서). 2024. 6. 1.
"집에 연락할 일은 없습니까?"
"전화를 좀 하고 싶소."
"알겠습니다."
이병희 중령은 순순히 전화기를 갖다 주었다.
호암은 집에 전화를 걸어 를 걸어 "지금 돌아왔다. 나는 무사하니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렀다. 몇 달 만에 듣는 가족의 목소리인가. 비록 만나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반가웠다.
다음 날인 6월 27일 아침 9시쯤 이병희 중령이 호텔로 호암을 찾아왔다. 호암은 그와 함께 다시 지프를 타고 퇴계로에 있는 참의원 회관훗날 원호처로 바뀜 으로 갔다. 이병희 중령이 호암을 100평쯤 되는 넓은 방으로 안내했다. 검은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군인 몇 명과 함 께 방 저쪽에서 걸어왔다.
작은 키에 바싹 마른 체구, 강인한 인상.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그가 바로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재건최고회의 부의장이었다.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하지 않으셨습니까?"
박 부의장이 부드럽게 물었다. 뜻밖이었다. 팽팽하게 가슴을 조여오던 긴장감이 어느 정도 풀어져나갔다.
"지금 우린 11명의 부정축재자를 잡아 가두었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중간 생략)
그는 밖에 대기하고 있던 이병희 중령을 불러 그 이유를 묻고, 곧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호암은 박 부 의장과 악수를 나누고 이병희 중령을 따라 호텔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이병희 중령이 호암을 찾아와 이제 그만 집으 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호암은 혹시 다른 경제인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아직 그대롭니다."
"그럼 나도 갈 수 없소."
"왜 그러십니까?"
"그분들은 모두 나와 친한 사람들입니다. 부정축재자 1호인 나는 호텔에 편히 있다가 집에 가고, 자신들은 이 더운 여름날 감옥에 갇혀 있다면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나중에 내가 그 사람들을
무슨 얼굴로 보겠습니까? 차라리 나도 감옥으로 보내주시오."
호암은 그들을 풀어주지 않으면 자신도 집에 갈 수 없다고 버텼다. 이병희 중령은 호암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 들었다.
"참 어쩔 수 없는 분이군요."
이병희 중령은 다음 날 다시 호암을 찾아와 잡혀간 경제인들이 모두 풀려났다며 말했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집으로 돌아온 호암은 이후 부정축재 문제로 여러 기관에서 찾아 오는 조사원들에게 시달렸다. 고단한 나날이었다. 호암은 어쩔 수 없이 조사에 응했고, 똑같은 설명을 몇 번씩 되풀이하느라 지칠 대
로 지쳤다. 참다 못한 호암은 이병희 중령에게 한 기관에서 조사를 받게 해주든지, 아니면 아예 호텔에 다시 가둬달라고 부탁했다. 이병희 중령은 즉시 호암의 집으로 헌병을 보내고, 미리 허가를 받아
야 조사를 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제야 호암은 간신히 조사 공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도영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구속되고, 박정희가 의장이 되었다.
며칠 후 박정희 의장이 한남동에 있는 한식집으로 호암을 불러 물었다.
"이 사장, 경제인들 사이에서 부정축재로 벌어들인 돈을 내놓으라는 것에 대해 말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박 의장의 말투는 거칠었다. 기업인들의 태도가 몹시 못마땅한 듯했다.
(중간 생략)
"당연한 일 아닙니까? 내라는 대로 다 내면 살아남을 기업이 없을겁니다.
(중간 생략)
"그래요."
호암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좋겠습니까?"
"처음 의장님을 만났을 때 말씀드렸듯이 기업인들을 나라 경제를...."
"다만 정 일으키는 데 활용해야 합니다."
느 분야에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오."
"먼저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묶어놓은 경제인들을 풀어주셔서 "그 일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리고 부정축재로 내야 "네.
할 돈을 크게 줄여주시고, 그 돈을 전부 국가 기간산업에 투자하도록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국민들에게 부정축재자들을 대충 처리한 다는 인상을 줄까 봐 망설이시는 것 같은데, 그 문제는 정부가 공개 일에 적으로 강력한 투자명령을 내리면 해결될 것입니다."
"투자명령?"
"그렇습니다. 부정축재한 돈에 너희들 돈을 보태서 나라 경제에 필요한 공장을 지으라고 하고, 공장을 다 지은 후에는 부정축재한 돈만큼의 주식을 정부에 내라고 하는 겁니다."
"그거 좋은 생각입니다. 하지만 기업인들이 투자명령을 받아들이
(중간생략)
"돈을 낼 시간을 벌 수 있는 일을 마다할 기업인은 아마 없을 겁 니다. 정부도 그때 가서 과연 나라에 해를 끼쳤는지, 이바지했는지 를 다시 평가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요."
박 의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암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의 입 가에 웃음이 묻어 있었다.
"다만 정부는 제철, 시멘트, 비료 등으로 투자대상만 정하고, 어 느 분야에 투자할지는 기업인들이 서로 의논해 정하도록 하시면 될 겁니다. 각자 처해 있는 사정이 다르니까요."
"그 일을 이 사장이 맡아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네. 좋습니다. 제가 힘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그 후 부정축재 처리 방향은 180도 바뀌었다. 8월 2일에 정부가 89개 기업에 내도록 한 금액은 모두 831억 환이었다. 하지만 8월 12 일에는 27개 기업에 378억 800만 환으로 크게 줄었다. 그중에서 삼 성이 내야 할 돈은 전체의 27%에 달하는 103억 400만 환이었다. 그 해 말에 정부는 다시 조사 결과를 발표했는데 전체 금액은 501억 환 으로 늘어난 반면 삼성이 내야 할 돈은 오히려 80억 환으로 줄었다.
그보다 몇 달 앞선 8월 16일 정부와 기업 간의 의견을 조정하는 대표적인 단체가 생겼다. 바로 한국경제인협회 지금의 경제인연합회다. 초대 회장에는 호암이 뽑혔다. 회원은 부정축재로 구속되었던 12명 의 경제인이었다. 공직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던 호암이었지만 이번에는 경제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회장직을 맡을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7명이 더 들어오고, 11월에는 20여 명이 들어와 회원은 모두 40명이 되었다.
호암은 회원들의 의견을 모아 국가최고재건회의에 "대규모 공업 단지를 만들어 그곳에 공장을 짓자."는 건의를 했다. 공업단지라는 말 자체가 낯설게 들릴 때였다. 일반인들은 물론 일부 경제 관료들 조차 "공장을 지을 땅은 어딜 가든 있다. 굳이 한곳에 모아놓을 이 유가 어디 있는가?" 라며 반대하고 나섰다. 답답한 일이었다.
공장을 세우려면 먼저 전기나 물 사정이 어떤지, 육지나 바다 등 으로 물건을 쉽게 옮길 수 있는지 등등 여러 가지 조건을 살펴야 한 다. 일반 가정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고, 환경도 생각해야 한
다. 이러한 조건을 갖춘 곳에 대규모 공업단지를 만들어 각종 공장 을 세워야 시너지효과를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공장을 짓는 것보다 돈이 덜 들어가고, 외국에서 돈을 빌리기도 쉬워진다.
호암은 회원들과 함께 장소를 찾았다. 후보로 올라온 곳은 물금까 삼천포, 울산 등 세 군데였는데 그중에서 울산이 가장 알맞은 장소라는 결론이 나왔다. 호암은 그 즉시 뜻이 맞는 회원 몇 명과 울산으로 내려갔다. 삼성 일만 하기에도 바쁜 호암이었지만 그보다는 나라 경제를 살리는 일이 더 급했다. 나라가 없으면 삼성 도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호암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현장을 눈으로 직접 본 호암의 기쁨은 말할 수 없이 컸다. 울산은 그야말로 모든 조건을 갖춘 은혜의 땅이었던 것이다. 1만 톤급 배5~6대가 한꺼번에 들어올 수 있는 잔잔한 항만, 태화강의 풍부한 물, 육로의 교통 등 거대한 공업단지가 들어서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서울로 올라온 호암은 총회 때 답사 내용을 말하고 「울산공업단 지 건설계획서」를 국가재건최고회의에 제출했다. 계획은 그대로 받 아들여져 1962년 2월 3일 울산에서 기공식을 가졌다. 그 자리에 참 석한 박 의장은 희망에 찬 눈빛으로 축사를 했다.
"...4000년 동안 이어 내려온 가난의 역사를 씻기 위해, 국민들의 간절한 소원인 나라의 번영을 위해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 기에 새로운 공업단지를 세우기로 했습니다. ..."
감동적인 연설이었다. 박 의장의 축사가 끝나자 호암은 천천히 현장을 둘러보았다. 4·19혁명과 5·16군사쿠데타로 인해 힘없이 무 너진 비료공장의 꿈이 서서히 되살아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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