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가치투자의 창시자' 벤저민 그레이엄은 누구?
  • 관리자
  • 등록 2014-09-06 15:56:56
  • 목록 바로가기목록으로
  • 링크복사
  • 댓글
  • 인쇄
  • 폰트 키우기 폰트 줄이기

기사수정
 

'가치투자의 창시자' 벤저민 그레이엄은 누구?

워렌 버핏은 "(투자에 성공하려면) 벤저민 그레이엄(Benjamin Gragam. 1894~1976)을 따르라"고 말합니다. 그레이엄은 어떤 인생을 보냈고, 어떤 과정을 거쳐 투자의 눈을 길렀을까요.

1

1894년

- 5월 9일 영국 런던의 에버딘 로드 87번지에서 출생합니다. 부모님은 이 아이에게 벤저민 그로스바움(Grossbaum)이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그로스바움은 독일어로 큰 나무(BIG TREE)라는 뜻인데, 우리의 '길동이' 하는 식으로 흔히 쓰이는 이름입니다. 벤저민 그로스바움은 훗날 독일에 대한 거부감으로 자신의 이름을 벤저민 그레이엄으로 개명합니다.

- 그레이엄 집안은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도자기와 장식품을 수입해 판매하는 사업이 번창해 경제적으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1895년(1세)

- 그레이엄의 아버지 아이작 그로스바움은 "미국에 지사를 설립해 가업을 키우라"는 집안의 요청을 받아들여 미국 뉴욕으로 이주합니다.

- 그레이엄의 할아버지가 런던에서 폐렴으로 사망합니다. 집안 어른의 사망으로 집안이 흔들립니다.

1903년(9세) 아버지 아이작 그로스바움이 35세의 나이로 사망합니다. 그레이엄의 집안이 급격히 기웁니다. 아버지는 롱아일랜드의 워싱턴 묘지에 묻힙니다.

1906년(12세)

- 그레이엄의 어머니는 하숙집을 운영하면서 생계를 유지합니다. 그레이엄은 주당 2달러의 아르바이트로 집안을 돕습니다. 이 과정에서 돈이 세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 미 뉴욕시립대(CCNY) 부설 타운샌드 해리스 홀 고등학교에 입학합니다.

1907년(13세)

- 미국 주식시장이 폭락하면서 그레이엄의 어머니가 갖고 있던 US스틸이 파산하면서 주식이 휴지 조각이 됩니다. 그레이엄은 주식이 변동성이 크다는 사실을 절감합니다. 보이스 고등학교로 전학합니다.

1910년(17세) 보이스 고등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한 그레이엄은 미국 뉴욕의 최고 명문 콜롬비아대에 다니기를 열망합니다. 이를 위해 그는 콜롬비아대 동창회 장학금을 신청합니다. 여기에 합격하면 콜롬비아대에 사실상 합격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낙방 통보를 받고 그는 충격에 빠집니다.

1911년(18세)

- 차선책으로 미 뉴욕시립대(CCNY)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낙담한 나머지 중퇴합니다. 광고 세일즈맨, 영화관 매표원, 전화기 조립공 등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합니다.

- 9월의 어느 날, 콜롬비아대의 프레드릭 F. 케펠 학장으로부터 "상의할 게 있으니 언제든지 편리한 시간에 들르라"는 편지를 받습니다. 그레이엄이 케펠 학장을 만나자 케펠 학장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실은 자네는 지난해(1910년) 콜롬비아대 동창회 장학금 선발시험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는데, 자네 사촌인 루이스 그로스바움과 이름을 혼동해 실수로 자네를 선발대상자에서 탈락시켰네.자네가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콜롬비아대에 입학할 수 있다네."

미국에서 이런 일도 있군요.

1912년(19세) 콜롬비아대에 동창회 장학금으로 입학합니다. 수학, 철학, 영어, 그리스어, 음악 등을 공부하면서 인문적 소양을 넓힙니다. 첫 여자친구 엘다를 만납니다.

1914년(21세)

- 콜롬비아대를 졸업합니다. 케펠 학장의 조언에 따라 금융 분야의 직업을 갖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다 보니 콜롬비아대로부터 3곳의 교수직을 제의받지만 거절합니다.

- 월스트리트에 사무실을 둔 뉴버거, 핸더슨 & 룁(Newberger, Henderson and Loeb)이라는 긴 이름을 가진 증권 중개 회사에 연구원(Financial researcher)으로 취직함으로써 투자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레이엄은 훗날 회고록에서 알프레드 뉴버거 회장이 입사 인터뷰를 마친 후 "젊은이, 한가지 말해두고 싶은 게 있네. 자네가 투기를 한다면 돈을 모두 잃을 걸세. 그것을 항상 명심하게"라고 했다고 쓰고 있습니다. 1956년에 은퇴할 때까지 42년을 월스트리트에서 일합니다.

- 증권 분석가로서 미주리 퍼시픽 레일로드라는 철도 회사의 평가 보고서를 작성해 호평을 받습니다.

- 8월 3일,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집니다.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 포고를 합니다. 지구에 종말이 혼 것 같은 극도의 혼란이 벌어집니다. 이에 따라 미국의 주식 시장이 투매 물결에 휩싸이자 미 당국은 혼란을 막기 위해 신속하게 뉴욕증권거래소를 폐쇄합니다.

그런데 며칠 후 전쟁이 특수를 창출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주식 시장이 갑자기 일순간 장미빛으로 바뀝니다. 거래가 다시 시작된 주식 시장은 큰 폭으로 상승합니다. 단 며칠 사이에 회사 직원들이 사표를 냈기 때문에 일손이 모자랍니다. 그레이엄은 이 과정에서 주식시장의 변덕스런 속성을 파악하게 됩니다.

1915년(22세)

- 여러 개의 구리 회사를 거느리고 있는 모회사인 구겐하임이 저평가돼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1915년에 이 회사는 주주들에게 자회사의 지분을 나누어 주겠다고 공시합니다. 그 당시 구겐하임의 주가는 68.88달러였습니다. 그레이엄은 자회사의 주식가격을 근거로 구겐하임의 적정 가격을 계산한 결과 76.23달러임을 알게 됩니다. 그레이엄은 구겐하임 주식을 자신이 몸담고 있는 뉴버거 회사에 추천했고, 뉴버거는 많은 양의 구겐하임 주식을 사서 큰 돈을 법니다.

1916년(23세)

- 첫 부인이 되는 헤겔과 약혼합니다.

- 뉴버거, 핸더슨 & 룁에서의 보수가 주당 50달러로 인상됩니다.

1917년(24세) 헤젤과 결혼합니다.

1918년(25세) 장남 아이작 뉴턴이 태어납니다.

1919년(26세)

- 철도채권을 분석한 보고서가 월스트리트에서 주목을 받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레이엄의 이름이 알려집니다.

- 주식(보통주)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당시 월스트리트는 채권이 주된 거래 대상이었고 주식은 도박이나 투기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어쩌다 증권사가 주식에 관심을 갖더라도 회사의 내부 정보가 매입 판단의 기준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레이엄은 기업이 공개하는 경영 현황 보고서를 바탕으로 주식을 분석합니다.

1920년(27세)

- 뉴버거, 핸더슨 & 큅에서에의 파트너가 됩니다. 아울러 연봉이 50만달러로 껑충 뜁니다. 스물일곱의 젊은이에게는 상당한 액수입습니다.

- 미국 시민으로 귀화합니다. 그레이엄은 이전까지는 영국 국적을 갖고 있었습니다.

1923년(30세)

- 미국의 주식 시장이 대강세장에 진입한 것을 계기로 9년간 다녔던 뉴버거, 핸더슨 & 큅을 그만두고, 지인과 함께 사설투자회사 그레이엄 코퍼레이션을 설립하면서 독립합니다. 이 회사는 이후 그레이엄 뉴먼사(투자회사, 뮤추얼 펀드)로 발전합니다.

- 화학회사 듀퐁 주식이 저평가돼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당시 듀퐁은 자동차 회사 제너럴모터스(GM)의 주식을 많이 매입했습니다. 그러나 듀퐁의 시가총액은 듀퐁이 가진 지엠의 시가총액 지분보다 더 낮았습니다. 그레이엄은 지엠의 주가가 고평가되어 있거나 아니면 듀퐁의 주가가 저평가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레이엄은 시장이 이 불균형을 조정할 것으로 보고 듀퐁 주식을 사고, 지엠 주식은 빌려서 팔았습니다. 그러자 곧 듀퐁의 주가가 올랐습니다. 그는 듀퐁 주식에서 시세차익을 보고, 지엠 주식은 시장에서 사서 되갚아 돈을 법니다. 차익거래로 돈을 번 것입니다.

- 청산 절차를 밟고 있던 US 익스프레스 주식을 매입합니다.

1925년(32세)

- 제롬 뉴먼(Jerome Newman)이라는 브로커와 함께 그레이엄 뉴먼이라는 투자 파트너십을 설립합니다. 이 회사의 주된 투자 방식은 자산가치에 근거한 투자였고 차익거래와 공매도도 병행합니다. 이 파트너십은 1956년 그레이엄이 은퇴할 때까지 31년동안 유지됩니다.

그레이엄

1926년(33세)

- 투자자들로부터 40만달러의 투자금을 유치합니다.

- 철도회사 노던 파이프 라인이 저평가된 것을 발견합니다. 노던 파이프라인은 스탠더드 오일의 독점 체제가 해체되면서 새로 설립된 8개의 송유관 회사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당시 기업들은 단 한 줄 짜리 손익계정과 아주 간략한 형태의 대차대조표만 공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외부인은 회사의 재무상황을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레이엄은 주간상업위원회(ICC)에 제출된 이 회사 보고서를 분석한 끝에 주가가 65달러인데 반해, 현금성 자산은 주당 95달러에 달한다는 사실을 밝혀냅니다. 게다가 이 회사는 매년 6달러의 배당금을 지급하고 있었습니다.

그레이엄은 이 회사 주식 2,000주를 매수해 2대 주주가 됩니다. 당시 노던 파이프라인의 전체 발행주식수는 4만주였고, 최대주주는 록펠러 재단이었습니다.

1927년(34세)

- 노던 파이프 라인 주주총회에서 자본 잉여금을 주주에게 배분해줄 것을 요구하지만 거절당합니다. 그러자 노던 파이프 라인 주식을 더 매입합니다.

- 아들 뉴턴이 유양돌기염으로 사망합니다.

- 콜럼비아대에서 강의를 시작합니다. 데이비드 도드가 그레이엄의 강의를 수강합니다. 나중에 도드는 그레이엄의 동료가 됩니다.

1928년(35세)

- 노던 파이프라인 경영진과 다시 대결을 벌여 승리합니다. 이 결과 큰 수익을 냅니다. 그레이엄은 자서전에서 이를 '노던 파이프라인 전투'라고 회고합니다.

- 콜롬비아대에서 <증권분석> 강의를 시작합니다. 이 강의는 콜롬비아대의 최고 인기 강좌가 됩니다. 그레이엄은 1954년까지 이 강좌를 맡습니다.

1929년(36세)

- 그레이엄 뉴먼사의 자본금이 250만달러로 늘어납니다. 설립 4년만에 큰 성공을 거둔 것입니다.

- 일부 전문가들 사이에 대공황이 임박했다는 주장이 나돌고, 그레이엄도 이 주장이 동의합니다. 그러나 그레이엄은 생각은 그렇게 했으면서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습니다.

- 결국 대공황이 닥쳤고 1929년 한해 동안 그레이엄 뉴먼사는 20%의 손실을 기록합니다.

1930년(37세)

- 펀드가 다시 50%의 손실을 기록합니다. 글자 그대로 반토막이네요. 그레이엄은 생활에 어려움을 겪게 되고, 강의와 저술, 컨설팅으로 생계를 유지합니다. 헤절과의 결혼생활도 불안정해집니다.

1931년(38세) 펀드가 또 다시 16% 손실을 기록합니다. 최초의 자본금 250만달러 가운데 70%가 사라진 것입니다. 75만달러가 남았네요.

1932년(39세) 포브스에 '미국 기업은 살아있는 것보다 죽는 게 더 가치있는가?"라는 연재물을 실어 상장 기업 대부분의 주가가 청산가치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1934년(40세)

- 데이비드 도도와 함께 <증권분석>(Security analysis) 초판을 맥그로힐에서 발간합니다. 7년간의 집필 기간 끝에 나온 책입니다. 이후 1940년, 1951년, 1962년, 1988년에 개정판이 나옵니다. 그는 이 책에서 투자를 다음과 같이 정의합니다.

"투자란 철저한 분석을 바탕으로 투자원금의 안정성과 적당한 수익이 보장되는 행위를 말하며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되지 않는 행위는 투기다."

(An investment operation is one which, upon thorough analysis promising safety of principal and an adequate return.)

1935년(41세) 대공황기의 손실을 가까스로 전액 만회합니다. 1929년 대공황이 시작된지 6년만의 일입니다. 소중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레이엄은 이때부터 손실을 입지 않습니다. 그는 1956년 은퇴할 때까지 31년간 연평균 17%의 수익을 거둡니다.

1937년(43세)

- <현명한 투자자의 재무제표 읽는 법>(The interpretation of financial statements)을 출간합니다.

- 헤젤과 이혼합니다.

1938년(44세) 캐롤 웨이드와 두번째 결혼을 합니다.

1944년(50세) 어머니가 노상 강도에게 살해됩니다. 그레이엄은 큰 슬픔에 빠집니다.

1948년(54세) 보험사 가이코의 주식을 매입해 큰 수익을 냅니다.(후일 1976년 워렌 버핏이 이 회사가 위기에 처하자 대규모로 투자해 주력 회사로 키웁니다)

1949년(55세)

- 가치투자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현명한 투자자>(The intelligent invester)를 발간합니다. 1954년,1959년에 각각 2,3판을 냅니다. 1973년에는 최종판이자 4판을 워렌버핏의 도움을 받아 출간합니다.

1950년(56세)

- 콜롬비아대에서 자신의 강의를 듣던 워렌 버핏을 만납니다. 자신의 강의를 경청하는 버핏에게 관심을 갖습니다.

1951년(57세)
- 콜럼비아대를 졸업한 버핏이 그레이엄에게 그레이엄 뉴먼사에 일하고 싶다고 요청했으나 거절합니다.

1954년(60세)

- 결국 버핏을 채용합니다. 버핏이 자꾸 조르자 승낙한 것입니다.

- 그레이엄 뉴먼 파트너쉽 자본금이 600만달러로 커집니다.

1956년(62세)

- 그래이엄 뉴먼 파트너쉽을 해산하고 증권업계에서 공식적으로 은퇴합니다. 그는 뉴먼 파트너십의 성공적 운영으로 큰 부자가 돼 있었습니다. 그는 캘리포니아주 비버리힐즈로 이주해 여생을 그곳에서 보냅니다. 그는 이곳에 있는 UCLA경영대학원 교수가 되어 이후 15년간 무보수로 강의합니다.

- 워렌 버핏은 고향 오마하로 가 투자자를 모집해 전설의 투자 인생을 시작합니다.

1957년(63세) 회고록 일부를 집필합니다.

1974년(80세) 미국 주식 시장이 폭락세를 보이자 "초저가 세일 기간이므로 주식을 사라"고 촉구합니다.

1986년(92세) 워렌버핏이 콜롬비아대학교에서 <그래이엄과 도드 마을의 위대한 투자자들>이란 제목으로 연설을 합니다.

1988년(94세) 프랑스에서 노환으로 사망합니다. 월스트리트는 그레이엄에게 '증권분석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헌사합니다. [COPYRIGHT 재배포 및 무단 전재 금지]

 

 

ihs_buffett@naver.com
0
  • 목록 바로가기
  • 인쇄


최신뉴스더보기
많이 본 뉴스더보기
  1. 주식투자 조기교육 필요할까? 이상하게도 한국에서 ‘주식투자’는 공공연한 금기어가 되어 있다. 주위 사람들에게 자식들에게 주식투자 공부를 시키자고 하면 대부분 집안 망한다고 손사래를 친다. 눈치없이 자꾸 이야기를 하면 기피인물이 되어 연락조차 뜸해진다. 대학에서 정식으로 주식투자 공부 좀 가르치자고 하면 대체로 교수들은 학생들에게 객장에 앉...
  2. 세방, 항공화물운송과물류주 저PER 1위... 2.84배 세방(대표이사 최종일. 004360)이 10월 항공화물운송과물류주 저PER 1위를 기록했다.버핏연구소 조사 결과에 따르면 세방은 10월 항공화물운송과물류주 PER 2.84배로 가장 낮았다. 이어 동방(004140)(4.48), 한솔로지스틱스(009180)(4.71), KCTC(009070)(4.88)가 뒤를 이었다.세방은 지난 2분기 매출액 3638억원, 영업이익 116억원을 기록하며 전년 동기 대비 매출..
  3. [버핏 리포트] 대덕전자, IT 세트 수요 부진에도 AI 신규 고객사 확보 가능성 -NH NH투자증권이 18일 대덕전자(353200)에 대해 주요 전방산업인 IT세트 및 전장 수요 둔화가 고려되지만, 다음해 업황 회복 및 AI 가속기향 다중회로기판(MLB) 신규 고객사 확보가 가능하다며 투자의견은 ‘매수’, 목표 주가는 기존 3만1000원에서 2만4000원으로 하향 조정했다. 대덕전자의 전일 종가는 1만8010원이다. 이규하 NH투자증권 연구원..
  4. [버핏 리포트]KT&G, 담배가 부동산 실적 살렸다..."해외 담배 실적 역대 최대 전망"-신한 신한투자증권이 18일 KT&G(033780)에 대해 부동산 부문의 실적 공백을 국내외 담배사업 부문이 방어했고, 특히 해외 담배 사업부문은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할 것으로 예측된다며 투자의견 ‘매수’를 제시하고 목표주가를 12만5000원으로 상향했다. KT&G의 전일 종가는 10만7500원이다.조상훈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KT&G는 3분기 매출액 1.62조원(전...
  5. [버핏 리포트] 효성중공업, 중공업 마진 후상향 기대...이익 비중 증가할 듯 -하나 하나증권이 18일 효성중공업(298040)에 대해 계절적 비수기인 2분기 건설 부문에서의 일회성 비용 해소 및 중공업 부문 이익률이 두 자리 수로 회복돼 양호한 실적이 기대된다며 투자의견은 매수, 목표주가는 52만원으로 기존대비 30% 상향했다. 효성중공업의 전일 종가는 40만6500원이다.유재선 하나증권 연구원은 효성중공업의 3분기 실적으로 .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