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제국 록펠러 : 그 신화와 경멸의 두 얼굴'
론 처노 지음. 안진환, 박아람 옮김. 21세기 북스. 2010. 3. 4. 초판 발행.

-P.S. 존 D. 록펠러(1839~1937)는 자본주의 역사상 최고 부호이다. 자본주의가 시작된 18세기 이후 록펠러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진 부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1937년 사망 당시 보유한 재산은 약 14억 달러이며 이는 당시 미국 GDP의 약 1.5~2.2%(4,000억~5,000억 달러)였다. 현재 세계 최고 부호로 꼽히는 일론 머스크는 미국 GDP의 약 1.3%(약 3,000억 달러)이다. 그러므로 록펠러는 자본주의 역사상 최고 부호이다.
◆ 미국 석유시장 90% 장악하다
-존 D. 록펠러가 경영한 스탠다드오일(Standard Oil)의 19세기 후반 미국 정유 시장 점유율은 약 90%였다. 현대식 독점 기업 모델의 원형이다.
-스탠다드 오일이 시작된 1840년대 미국은 경제활동이 활발했다. 곳곳에서 은행이 문을 열었고, 운하가 개설됐다. 철도와 전신의 발달로 최초로 전국 규모의 시장이 창출됐다. 이에 따라 석유 수요가 급증했다.
- 1890년대 스탠더드 오일은 최고의 권력을 유지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석유 시장의 84%를 장악했고, 정체 원유 생산량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사상 최고 수치의 점유율이었다. 몇 해동안 석유 산업이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예언들이 골치를 썩였고 전기 사용량이 늘었음에도 석유 산업의 전망은 전례없이 밝았다.
-1907년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 전체 등유의 87%를 차지하고 있었고, 수출 등유의 87%를 취급하고 있었으며, 미국내 등유의 89%를 판매하고 있었다. 회사 규모는 가장 큰 경쟁사인 퓨어 오일의 20배가 넘었다.
- 휘발유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저질 부산물이었던 휘발유가 쓸모를 찾았다. 미국에 등록된 자동차 대수는 1898년 800대에서 1900년 8,000대로 10배 급증했다. 가솔린도 마찬가지였다. 자동차가 나오기 전에는 가솔린을 어디에 사용해야 할지 몰랐기때문에 정유사는 야음을 틈타 가솔린을 강물에 흘려 보냈다. 그런데 가솔린을 연료로 사용하는 가솔린 자동차가 탄생했다.
- 석유왕 록펠러가 가장 고민했던 것은 석유가 바닥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당시 석유 산업은 산업이라기보다는 투기이자 모험이었다. 석유가 인류에게 지속적으로 보탬이 될지, 아니면 반짝 기적에 불과할지 아무도 확신하지 못했다.
◆ 일상에서 검소하고 성실하라
- 록펠러의 아버지 빌은 1855년 6월 12일 온타리오 오웨고 바로 남쪽에 위치한 뉴욕주 니컬스에서 마거릿 엘런과 결혼식을 올렸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이중 결혼 생활을 했다. 빌은 록펠러의 가족을 클리블랜드에 정착시켰다. 온타리오 인근이었다. 아버지 빌은 이유없이 록펠러를 학대했다. 그래서 록펠러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좋지 않았다.
- 당시 미국인들은 학교 교육을 신뢰하지도,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당시 미국인들은 대학 학위를 고소득의 수단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돈을 벌고 싶은 젊은이들은 이른바 실무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록펠러도 7개 도시에서 분교를 두고 체인 형태로 운영되는 E.G. 폴섬 상업전문학교에서 40달러를 내고 3개월 과정을 이수했다. 클리블랜드 분교는 그 마을 최고의 빌딩인 라우스 빌딩의 꼭대기층에 위치해 있었고, 창밖으로 퍼블릭 스퀘어가 내려다보였다. 이 학교에서는 복식 부기와 문서 작성법(Writing skill), 은행업, 환거래, 상법을 가르쳤다. 록펠러는 이 교육 과정에 몰입했다.
-1855년 만 16세에 상업전문학교를 이수한 록펠러는 일자리를 찾는데 전력질주했다. 그해 여름 록펠러는 일주일에 6일씩 매일 오후 늦게까지 6주동안 필사적으로 일자리를 찾아 다녔다. 뜨겁고 단단한 길바닥을 걷느라 발이 몹시 아팠지만 결연한 의지로 강행군했다. 클리블랜드는 인구 3만명의 도시였다.
- 1855년 9월 26일 록펠러는 머위가에 위치한 위탁판매 및 선적회사 휴잇앤터틀을 찾았다. 부사장인 헨리 B. 터틀이 록펠러를 면접했는데, 때마침 터틀은 회계 장부를 맡을 사람이 필요했다. 부사장은 록펠러에게 점심 시간 후에 다시 오라고 했다. 록펠러는 흥분을 억누르며 계단을 내려왔다.
-록펠러는 점심 시간이 끝날 땍까지 기다렸다가 사무실로 돌아가서 사장인 아이작 I. 휴잇에게 면접을 봤다. 클리블랜드 철광회사의 창립자로서 상당한 부동산을 소유한 휴잇은 록펠러의 눈에 대단한 자본가로 보였다. 휴닛은 록펠러가 글씨를 잘 쓰는지를 꼼꼼히 확인한 뒤 말했다.
"자네에게 기회를 주지."
급료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바로 록펠러에서 코트를 걸어놓고 일을 하라고 지시했다. 훗날 노인이 돼서도 록펠러는 그날을 극적인 순간으로 기억한다.
"내 모든 미래가 바로 그날 정해진 것 같았습니다 그때 일자리를 얻지 못했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생각하면 온 몸이 떨려옵니다."
록펠러는 석달 후에야 처음으로 밀린 봉급을 받았다. 록펠러는 9월 26일을 취직 기념일로 부르며 평생동안 자신의 생일보다 더 소중하게 여겼다.
록펠러는 이 직장에서 광범위한 상업의 세계를 접했다. 1855년의 마지막날 휴잇은 록펠러에게 석달치 급료로 50달러를 지급했다. 일당 52센트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 보조 장부계원의 급료를 한달에 25달러 즉 연봉 300달러로 대폭 올리겠다고 말했다.
록펠러는 몹시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죄책감을 느꼈다. "나는 범죄가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종교적인 가책 때문에 자신의 욕심을 두려워했다는 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부를 축적하는 것과 노골적으로 돈을 탐내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록펠러는 검소하고 시간을 엄수했으며 근면했다.
-어느 날 오하이호에서 록펠러는 평소 존경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목사님은 "돈을 버십시오. 정직하게 벌어서 현명하게 나눠 주십시오"라고 했다. 록펠러는 그 말씀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 1857년 1월 터틀이 회사를 그만두자 록펠러는 선임 장부계원으로 승진해 17세에 전직 부사장이 맡았던 업무를 떠맡았다. 공동 경영인이었던 터틀의 연봉은 2,000달러였지만 록펠러의 연봉은 500달러에 불과했다.
- 1858년 4월 1일, 존 D 록펠러는 아이작 휴잇과 결별하고 아버지에게 빌린 돈으로 리버가 32번지에 사무실을 둔 클라크 앤 록펠러사의 공동 경영인이 됐다. 당시 그의 나이 18세였다.
"경영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멋진 일이었습니다. 벅찬 자부심을 느꼈습니다(당시 미국인들의 사고방식이 엿보인다. 이 시기의 미국 사회에 상업은 장려받고 있었다). 자본금 4,000달러 회사의 공동 경영인이 됐으니까요."
-록펠러는 자신의 이름을 걸고 거래를 시작해 밀가루, 햄, 돼지고기를 중개했다. 록펠러는 클리블랜드 부두에서 두각을 나타내 '록펠러씨'라는 존칭을 얻었다.
- 1890년대부터 시작된 스탠더드 오일의 재산증식은 미국 역사에서 대중을 고무하면서도 동시에 경계심을 갖게 할만한 새로운 시대가 알리는 것이었다. 사업가로서의 록펠러의 명석함과 탐욕의 불균형은 한 국가의 근본적인 경제 구조, 부의 재분배, 기업과 정부의 관계 등 미국에 심각할 질문을 야기햇다. 록펠러는 대기업의 효율성을 명백하기 증명한 독점의 한 형태를 완성시켰다.
◆ 회계(accounting), 부자가 되는 출발점
-록펠러는 사업가로 성취하기 위해 회계(accounting) 지식이 필수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1855년 9월 처음으로 일을 시작하면서 그는 10센트짜리 작은 빨간색 공책을 마련해 '장부A'라는 제목을 달았다. 여기에 자신의 지출과 수입 내역을 상세히 기록했다. 록펠러는 장부A를 평생 귀중품 보관소에 보관했다. 그는 회계를 부의 출발점으로 인식했다.
"가장 똑똑하다는 임직원 중에도 부기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업이 돈을 벌어다주는지, 어떤 사업이 손해를 가져다주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록펠러는 돈을 통해 세속적인 차원에서는 물론이고 도덕적인 차원에서도 위업을 달성할 수 있다고 보았다.
-1854년 가을 록펠러는 신앙고백을 한 후 스케드 집사의 인도로 침수세례를 받고 교인의 자격을 완전히 갖추었다. 주일이면 늘 교회 어디에서든 록펠러를 볼 수 있었다. 복도를 쓸고, 불을 피우고, 등불을 켜고, 보도를 창소하고, 사람들을 안내하고, 성경 공부를 하고, 찬송을 하는 등 이타적이고 완벽한 교인이라고 할만한 모든 임무를 록펠러는 수행했다. 그는 일개 사무원에 가진 돈도 별로 없었지만, 그 작고 낡은 교회와 연관된 조직 모두에 일일이 기부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 그는 정확한 사람이었다. 15센트를 기부하겠다고 하면 그는 누가 뭐래도 그 액수를 기부했다. 또, 그는 성경 공부를 규칙적으로 해서 성경의 내용을 전부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생동안 아무리 바빠도 주일마다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언제나 예배당의 맨 앞줄에 앉았다. 평생 십의 일조를 냈다. 세계 최고 부자가 십의 일조를 내는 것은 복잡했다. 그래서 십의 일조를 계산하는 전담 부서를 두었다.
-성경의 내용과 그의 자본주의적 현실 비즈니스는 완벽히 일치했다.
◆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도망자
-1911년 미 정부에 의해 스탠더드 오일은 해체됐다. 스탠더드오일은 엑슨모빌(Exxon Mobil Corporation), 모빌오일(Mobil Oil Corporation), 콘티넨털오일(Continental Oil Co.), 아모코(Amoco Corporation)를 비롯해 33개 회사로 분할됐다.
-앞서 1890년 미국 최초의 독점 금지법인 셔먼법이 제정됐다. 존 셔먼 상원의원이 입법한 셔먼법은 외형상 일반적인 독점 금지법이었지만 사실상 과도한 독점으로 각종 폐해를 양산했던 스탠더드오일을 겨냥해 만든 법이었다.
-1906년 11월 18일 미 연방 정부는 셔먼 트러스트 법안으로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해산하기 위한 소송을 미주리주에서 제기헸다. 피고로 뉴저지 스탠더드 오일과 그 자회사 65개가 거론됐다. 존 록펠러, 윌리엄 록펠러, 헨리 플래글러, 올리버 페인, 존 아치볼드, 헨리 로저스 등 중역들도 소송에 포함됐다. 이 결과물이 바로 1911년 시행된 스탠더드 오일 해체였다.
-이같은 결과를 맞이한 것은 록펠러가 대중 정서와 여론을 의식하지 않았고 심지어 무시했기 때문이다.
-스탠더드 오일 해체는 아이다 타벨(Ida Minerva Tarbell, 1857~1944)이라는 여성 작가에 의해 방아쇠가 당겨졌다. 아이다 타벨은 미국의 언론인으로 미국의 진보시대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타벨은 자신이 편집장으로 근무학 있던 시사 전문지 <맥클루어>를 통해 ‘스탠더드 오일의 역사’라는 시리즈를 20회 내보냈다. 이 기사는 1904년 동명의 책으로도 나오게 된다. 이 책은 미국 뉴욕타임스가 선정한 미국 20세기 저널리즘중 가장 중요한 100개의 보도에서 5번째로 뽑혔다
-아이다 타벨의 연재 기사는 스탠더드 오일에 관한 것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다. 그녀의 글은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 조직을 예리하게 분석한 로포르타주의 역작이었다. 타벨은 연대기를 정확하게 정립했고, 이 기업 연합이 어떻게 형성됏는지를 정확하게 설명했으며 복잡하게 뒤얽힌 석유산업의 역사를 알기 쉽게 기술했다.
그녀의 글은 간명하고 합리적이었으나 표면을 조금만 들추어 보면 적개심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타벨의 아버지와 오빠는 정유회사를 운영하면서 스탠더드 오일과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타벨의 기사와 책은 한 기자가 팩트를 바탕으로 무적인 듯한 권력에 대항해 얼마나 그 권력을 망가뜨릴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그녀의 글은 정치적 만병 통치약이나 관념적인 처방을 내리는 대신, 독자들의 상식적 품위와 페러플레이 감각에 호소했다. 또, 스탠더드 오일의 사업 스타일에서 좀스럽고 야비한 부분을 들춰내면서 센세이셔널한 반향을 불러 일으켯다.
-스탠더드 오일이 독점 체제를 만들기 위해 경쟁사를 피도 눈물도 없이 망가 뜨리는 과정을 들춰내는 그녀의 글솜씨는 탁월했고 이는 미국인들의 분노를 촉발시켰다. 여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록펠러의 ‘놀라운 천재성’과 ‘성취능력’은 인정하면서도 스탠더드 오일의 스파이 활동, 가격 전쟁, 법원 회피 등의 자료를 토대로 “록펠러는 강요와 사기를 일삼았다”고 결론지었다. 또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인 모두의 기업이기 때문에 시민들이 나서서 이런 기업의 횡포를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타벨은 그녀의 아버지가 죽은 뒤 자기 아버지의 옛 숙적 록펠러를 ‘공정성’이라는 잣대를 갖고 공격했다. 그녀는 록펠러의 표정이 “간사하고 잔인하며 형용하기 어려운 혐오감을 자아낸다”고 했고, 포레스트 힐 저택은 “저속함과 흉측함이 상징”이라고 비판했다.
록펠러는 타벨에게 비공식적으로는 서로 통화했지만 공식적인 토론 제의는 거절했다. 그는 친구에게 이를 이렇게 설명했다.
“잘못된 생각을 가진 여자와는 한 마디도 말하고 싶지 않아.”
-록펠러와 동료들은 여론을 무시하면서 인터뷰를 거부했고, 청문회에서도 반항적으로 행동했다.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을 응징하려는 대중적 분위기를 심각하게 오판했고 침묵을 고수했다. 스탠더드 오일은 "어떤 불법적인 방법도 고의로 행한 적이 없다"는 반박 성명을 냈다.
록펠러와 동료들은 스탠다드 오일 독점 체제를 깨뜨리려는 정치가들의 노력을 조롱했다. 냉혹한 비즈니스의 세계를 살아온 스탠더드 오일의 임원들은 사업 경쟁자를 다루듯이 정부 관리들을 거칠게 대했다. 스탠더드 오일의 임직원들에게 타협이란 너무 낯선 것이었다. 그들은 융통성을 조금만 발휘하면 반독점 소송을 피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중략)
이는 사태를 돌이킬 수 없게 만들었다. 매클루어 매거진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만약 록펠러씨가 탁월한 사업 협잡군만큼이나 위대한 심리학자라면 자신이 대중들에게 끔찍한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록펠러는 미국 언론사들의 취재 표적이 됐다. 기자들은 록펠러가 숨어 있으리라고 추정되는 곳을 찾아 전국을 뒤졌다. 록펠러는 요새화된 포칸티코에 은신했다. 록펠러는 전화 도청이 우려돼 아내에게 전화를 하지 말라고 권고했다. 록펠러와 동료들은 이야기 하나를 전국 방방곳곳에 퍼뜨릴 수 있는 인쇄매체의 힘을 간과했다.
록펠러는 은신하는데 성공했지만 미국인들은 곳곳에서 록펠러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어느 시사만화에는 록펠러가 자기 얼굴이 표지에 실린 간행물로 가득찬 가판대로 다가가 서글픈 목소리로 "내 이야기가 실리지 않은 게 있나요?"라고 묻는 장면이 실렸다.
또 다른 시사 만화에는 록펠러가 동전과 지폐를 삽으로 퍼서 저울의 한쪽 접시에 담고 있고, 다른 한쪽에는 '우호적인 말 몇마디'라고 쓰인 종이가 놓여 있었다. 이 만화의 아래에는 '그는 그 값으로 얼마나 퍼부을까?'라고 쓰여 있었다.
누구보다도 비밀스러웠더 록펠러는 이제 자신의 가장 내밀한 모습이 만천하에 드러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정부와 언론으로부터 집요하게 괴롭힘을 당하는 록펠러는 가정에서도 위안을 찾을 수 없었다. 에디스는 우울증을 치료할 목적으로 유럽에 요양을 다녀왔지만 건강이 여전히 나빴다. 록펠러 주니어의 건강도 허약했다. 세티는 페렴과 독감으로 맥을 추지 못했다. (P. 338~350)
◆ 가장 자본주의적이면서 가장 박애주의적인... '모순적 인생'
-1937년 5월 23일 새벽 4시 5분 록펠러는 잠든 상태에서 숨을 거두었다. 98번째 생일을 6주 앞두고 평화롭게 갔다. 천수를 누린 셈이다. 숨을 거두기 전 그는 심장발작을 일으켰고 혼수상태에 빠졌다. 공식적인 사인은 심장벽이 딱딱해지고 염증이 생기는 심근경색이었지만 노환으로 사망했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록펠러의 평온한 종말은 그가 내세에 응보를 받을 것으로 기대했던 적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5월 27일, 록펠러의 시신은 클리블랜드로 돌아가 그를 사랑했던 두 침례교도, 어머니 엘리자와 아내 세티 사이에 묻혔다. 무덤을 훼손하려는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우려에 록펠러의 관은 방탄 처리를 한 무덤에 안치되고 무거운 돌로 봉쇄됐다.
- 록펠러는 모순적인 유산을 남겼다. 깊은 신앙과 탐욕, 동정심과 교활함을 동시에 지니고 잇었던 록펠러는 이중적 성향이 있는 미국 청교도의 전형이었다. 근검과 적극성을 장려하면서 동시에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본능을 부추겼던 미국의 선조인 것이다. 록펠러는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성격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던 부모에게서 이중적인 신호를 읽으며 자랐다. 그가 조직의 탐욕과 박애주의적 깨달음, 이 두 가지의 교모한 전형으로 살아간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 록펠러는 국민이 선출한 정부에 대한 위협이었다. 세계 최초의 산업 트러스트를 만든 록펠러는 자유경쟁체제의 근본적인 취약성을 폭로하면서, 정부가 훗날 경쟁과 공정한 거래를 보장하는 규칙을 세세히 명기하도록 만들었다.
- 록펠러 사후 60년만에 스탠더드 오일의 자회사 4개인 엑슨, 모빌, 아모코, 셰브론은 세계 50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 록펠러가 타계하고 1년이 지나지 않아 사우디 아라비아와 쿠웨이트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됐고 석유가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경제에서 석유가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을 예고하는 사건이었다.
- 록펠러는 위기에 처하면 극단적으로 침착해졌다. 이 점에서 그는 타고난 리더였다. 사람들이 우왕좌왕할 수록 그는 더욱 침착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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